“라디오 대신, 바인스를 들어라”
극적인 재기, 그리고 새로운 비전.
개러지/펑크 팝 달인이 들려주는 결정적 앨범 [Vision Valley]
덩굴식물의 생명은 길다. 아니 끈질기다. 바싹 마른 줄기가 겨우내 퍼석대 보여도 봄이 되면 꾸물꾸물 새싹이 솟아나고 여름 내내 징그러울 정도로 무성한 이파리들로 눈부신 푸르름을 선사한다. 얽히고 설킨 줄기들은 끔찍한 혼돈 속에서 분투하지만 겹겹이 쌓인 손바닥모양의 잎들은 왕성한 생명력의 상징으로 거듭난다. 덩굴식물의 무기는 그 생명력이다. 그러면 우리가 아는 ‘덩굴들’의 운명도 미리부터 정해졌던 것일까. 대답은 그럴지도, 이다.
프론트맨의 아버지가 활동했던 60년대 밴드(The Vynes), 너바나에 대한 열정, 비틀즈에 대한 경외심. 이런 것들이 모여 바인스가 되었다. 실질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2001년 후반이지만 이들의 시작은 꽤나 일렀다. 예술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맥도날드에서 일하던 크렉 니콜스(Craig Nicholls)가 패트릭 매튜스(Patrick Matthews)를 만난 것이 1996년. 베이스를 연주하던 의대생인 그와 니콜스는 죽이 맞아 밴드를 결성했고 드러머인 데이비드 올리프(David Oliffe)가 합류해 3인조가 되었다.
대부분의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친구들의 파티 밴드로 실력 발휘하던 이들이 매체에 잡힌 것은 2001년 말이 되어서야 였다. 매력적인 데뷔 싱글 ‘Factory’를 두고 트렌드의 최전선에 있는 영국인들이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헤븐리 레코드(Heavenly Records)가 바인스를 낚았고 호박을 덩굴째로 잡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2002년 7월 [Highly Evolved] 발표됐다. 앨범에 쏟아진 평가와 대중의 반응은 대단했다. NME는 90초짜리 개러지/그런지/펑크 ‘Highly Evolved’를 즉시 ‘이주의 싱글’에 앉혔고 너바나와 비틀즈의 완벽한 결합, 이라는 호평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였다. 자신들의 절대적 우상과 전설을 넘어서버린 위대한 유산을 충실하게, 그리고 분방하게 활용할 줄 알았던 니콜스의 재능은 꼬투리 잡는 게 일인 평론가들의 입도, 단순하면서도 까다로운 대중의 입도 모두 막아버렸다.
찢어질 것 같은 소음과 거침없는 포효로 ‘통제’와는 거리가 먼 'Get Free'나 ‘Outtaway!’, 기막힌 하모니로 꿈결같기만 한 ‘Factory’나 ‘Country Yard’, 모두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기도 바뀐 참에 뭐라도 하나 터져줬으면 하고 바랬던 이들은 그제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그것이 비록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은 아니었더라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영국 언론의 애정공세에 겨워하던 이들이 다음으로 접수한 것은 미국 롤링 스톤지 커버. 호주 출신으로는 실로 20년만의 일이었으니 사건이라면 사건이었다.
그들의 무대는 또 어떠했나. 연일 외지에 오르내리는 크렉 니콜스의 기행은 하룻밤에 멀쩡한 기타 쉰일곱대를 산산조각 낼 정도로 '포악한' 것이었다. 쉰일곱대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여하튼 바인스는 야단법석 소음에 시끄러워 죽을 지경인 판국에 생각지도 않은 황홀한 하모니로 화를 녹여버리는 양면성을 지닌 그런 밴드였다. 투어에 지친 드러머가 떠나고 새 식구를 들이긴 했지만 누구도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줄은 예상치 못했다.
2004년 가장 고대하던 신보였던, 2집 [Winning Days]는 데뷔작의 그 모든 것이 거품이었다고 믿게 할 정도였다. 나아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앨범에선, 비틀즈 풍 하모니마저도 도가 지나쳤다. 막말로 싱글 ‘Ride’외엔 어필하지 않을 정도로, 어느 하나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고 단편적인 매력도 없었다. 게다가 영화 같은 상황도 기다리고 있었다. 뛰어난 송라이터임과 동시에 걷잡을 수 없는 행동으로 악명 높았던 니콜스. 그런데 그의 그런 상식 밖의 행동들은 결국 '정상'이 아닌 것이었다. 자폐증의 일종인 정신 질환이 모든 것의 원인. 당시 자신이 한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니콜스는 결국 치료에 들어갔고, 모든 게 끝난 것은 자명해 보였다. 한마디로 바인스의 세상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2006년 4월 초, 앨범 [Vision Valley]가 발표됐다. 이들에게 세 번째 앨범이란 애초에 불가능해 보였는데 말이다. 13곡이 고작 31분만에 끝나는데, 솜씨 또한 기막히다. 자신의 얘기를 하는 듯한 ‘Anysound’부터 바인스가 돌아왔음을 온몸으로 감지할 것이고, 첫 싱글 ‘Don’t Listen To The Radio’를 접하는 순간엔 ‘Highly Evolved’에 버금갈 정도로 캐치한 멜로디에 중독될 것이다. ‘Vision Valley’의 투명한 아름다움에 빠지고 ‘Dope Train’의 이국적이고 몽환적인 정서에 매료될 것이다. 1분, 2분 안에 끝나 버리는 12코스 후엔 6분이 넘는 ‘Spaceship’에 탄 채 소박한 유영을 즐기게 될 것이다.
'압축'이 지상 최대의 과제였던 모양이지만, ‘재기작’ [Vision Valley]에는 개러지 록, 펑크, 사이키델리아, 여기에 한번 더 짚고 가야만 할 환상적인 하모니가 비단같은 광택을 더하고 있다. 문명의 이기와 단절된 니콜스의 요양처에서 영감을 얻었고 기타의 라이언 그리피스(Ryan Griffiths), 드러머 해미쉬 로서(Hamish Rosser)가 동지애로 뭉친 앨범이니 이 시점에서 더 이상을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 뿐이다.
한때 바인스는, 한 라디오 방송이 생방송 도중 이들이 쓰던 기타를 불태워버릴 정도로 반감을 샀던 끔찍한 밴드였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다르게 펼쳐질 것이 분명하다. 첨단으로 진화된 로큰롤을 선보이며 승승장구의 시절을 보냈던 바인스. 이제 그들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뼈아프게 터득한 새로운 비전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사실 이러저러한 복잡한 얘기 따윈 필요치 않다. ‘바인스가 돌아왔다.’ 이 한마디면 충분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