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4학년 때의 일이니까 벌써 17년이 훌쩍 지나버린 셈이다. 문득 문승현 선배 (서울대 메아리 78학번) 에게서 전화를 받고 당시 혜화동에 있던 연우무대 연습실로 달려나갔다. 졸업한 선배들을 중심으로 노래 모임을 만들어서 공연을 한다고 했다. 노래를 모아서 보여 주던 손쉬운 콘서트도 아니고, 주제가 명확하고 스토리 라인이 있는 종합극이라고나 할까? 노래도 거의 창작곡으로 하겠다는 무모한 노력도 함께. 80년대 노래 운동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다고 자부하는 노래모임 '새벽'은 이렇게 탄생했고, 그리고 그 첫 공연 '또 다시 들을 빼앗겨'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첫 공연은 84년 봄, 김민기 선배의 주선으로 전주에 가서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녹음되어 있는 공연은 84년 가을에 국민대 학생회의 초청으로 국민대 체육관에서 공연했던 실황이다. 표신중 (고려대 노래얼 76학번), 이영미가 (노래얼 79학번) 연극반 경험을 바탕으로 극 전체 극본과 구성을 담당했었고, 문승현과 박미선 (이화여대 한소리 79학번), 그리고 내가 노래를 쓴다고 매달리면서 음악적 작업을 담당했었다. 김보성이 (메아리 79학번) 기재를 담당했었고, 전주공연에서의 기타 반주는 문승현과 노승종이 (메아리 79학번), 그리고 국민대 공연에서는 문승현과 내가 맡아서 했다. 무대에 섰던 면면을 보면 김광석 (연합메아리 82), 김삼연 (메아리 83), 설문원 (한소리 79), 조경옥 (메아리 78) 등이 기억이 난다. 서울대 총연극회 출신으로 당시 연우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던 문병옥(78학번), 오인두(76학번) 선배가 연극 부분에선 출연해서 중요한 역을 맡아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체 구성에 대한 그림과 음악적인 연출은 역시 문승현 선배의 몫이었다. 선배들의 기에 눌려서 난 노래 한 곡도 보태지 못했던 씁쓸한 기억이 난다.
당시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사건과 이에 대한 전두환 정권의 굴종적인 대응, 그리고 전두환의 방일 등으로 한일 관계에 대한 주체적인 대응이 진보적인 그룹의 주요한 화두였다. 일제 강점부터 해방을 거쳐서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에 이르기까지의 종속적이었던 한일 관계를 조명함이 그 주제였다.
구성은 대략 3부로 나뉜다. '새야 새야'에 가사를 덧붙이고 편곡한 주제곡을 필두로 '인트로'에 해당하는 서정적인 곡들이 줄을 잇는다. 그리고 이 공연을 위하여 만들어졌던 문승현의 노래 '이 산하에'가 김삼연의 목소리로 장엄하게 흘러나온다. 그리고 '메인'이라고나 할까? 종속적인 한일관계에 대한 일본 군부 정부의 속내를 이야기하는 연극적 요소의 삽입을 기조로 '팍스 아시아나'등 왜색문화 동화에 대한 풍자와 '대일본 대동아 공연권 건설' 새로운 기치를 내걸면서 극은 갈등의 절정을 향해 달려가게 되고, '피날레'로 김광석의 '녹두꽃' 등 투쟁적인 노래들로 매듭을 짓는 형식이다. 이렇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종합극 양식은 이후 당시 진보적인 현장에서의 노래 공연에 있어 하나의 전범이 되어 버린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것은 김광석의 청아했던 '녹두꽃'의 외침과 열창을 하던 김삼연의 '이 산하에'다. 이후 세션에 의해 다듬어진 반주와 스튜디오 녹음으로도, 조악한 음질의 이 실황 테이프에서 느낄 수 있는 생동감과 청아함을 찾기가 힘들다. 국민대 공연이 끝난 후, 쉴 틈도 없이 우린 김민기 선배가 주도하는 음반 작업 연습에 바로 돌입했다. 이 음반 작업의 성과물이 바로 '노래를 찾는 사람들 I' 이라는 불멸의 히트 앨범(?)이었다.
84년은 여러 가지 변화가 막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노래 운동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변화의 기착점에 노래모임 '새벽'과 '또 다시 들을 빼앗겨'라는 공연이 버티고 있다. 참여했던 멤버들의 면면에서 보이듯이 80년대 노래운동의 대표적인 일군들이 여기에 많이 모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80년대 진보적인 민중가요의 음악적인 귀중한 단초들을 찾아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공연이기도 하다.
이창학 (메아리 81학번..'벗이여 해방이온다' 작사, 작곡)
출처 : http://bob.jinbo.net/board/view.php?table=albumintro&no=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