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로운 그대 입술에 듣고 싶은 사랑이야기 호수같은 그대 눈동자 나에게는 말이 없구나, 누구를 사랑하고 있을까. 누구를 그리워하나. 나만이 좋아하고 있큰데 그 누가 있었나봐. 그를 보면 나는 좋아서 바보같이 웃고만 있네. 생각하는 그대 눈동자 무엇인지 답답하구나. 누구를 사랑하고 있을까. 누구를 그리워하나. 나만이 좋아하고 있는데 그 누가 있었나봐.
어디서 어디까지 그 마음 모르겠네. 어디서 어디까지 내 마음 모르겠네. 어디서 어디까지 그 마음 모르겠네. 어디서 어디까지 내 마음 모르겠네. 애타는 내 마음 그대는 모르네. 애타는 내 마음 그대는 모르네. 둘이서 만나면 님만을 사랑하네. 그대와 떨어지면 한없이 뛰는 가슴, 애타는 내 마음 그대는 모르네. 애타는 내 마음 그대는 모르네. 예 지나다 그대와 말없이 지나쳤네. 오늘은 왜 그런지 웃음이 떠나지 않네. 예 어디서 어디까지 그 마음 모르겠네 어디서 어디까지 내 마음 모르겠너 어디서 어디까지 그 마음 모르겠네 어디서 어디까지 내 마음 모르겠네 어디서 어디까지 내 마음 모르겠네 애타는 내 마음 그대는 모르네. 애타는 내 마음 그대는 모르네. 예 어디서 어디까지 그 마음 모르겠네. 어디서 어디까지 내 마음 모르겠네. 어디서 어디까지 내 마음 모르겠네. 어디서 어디까지 내 마음 모르겠네.
한번 보고 두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아름다운 그 모습을 자꾸만 보고 있네 그 누구나 한번 보면 자꾸만 보고 싶네 그 누구의 애인인가 정말로 궁금하네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 [간주중] 나도 모르게 그 여인을 자꾸만 보고 있네 그들 모두 넋을 잃고 자꾸만 보고 있네 그들 모두 한번 보면 자꾸만 보고 있네 그 누구의 미인인지 정말로 궁금하네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 [간주중] 한번 보고 두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아름다운 그 모습을 자꾸만 보고 있네 그 누구나 한번 보면 자꾸만 보고 있네 그 누구의 애인인가 정말로 궁금하네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 [종주중]
우린 너무나 보지 못했오. 우린 너무나 헤어져 있었오. 우린 너무나 만나지 못했오. 그동안 너무나 보고 싶었오. 즐거워 만나서,즐거워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우리 가져요. 즐거워 만나서,즐거워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우리 가져요. 우리 언제나 같이 있자. 우리 언제나 같이 살자. 우린 너무나 보지 못했오. 우린 너무나 헤어져 있었오. 우린 너무나 만나지 못했오. 그동안 너무나 보고 싶었오. 만나서 즐거워, 만나서 즐거워 즐거운 시간을 우리 가져요. 즐거워 만나서,즐거워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우리 가져요. 우리 언제나 같이 있자. 우리 언제나 같이 살자.
널 생각할 때 길따라, 널 보고플 때 길따라. 멀리 보이는 저 길로 나는 가고 있네. 한없이 보이는 저 길로 흘로 가고 있네. 난 떠나가네 길따라, 널 두고 가네 길따라. 오늘은 어느 길로 가볼까.큰 산블 넘어서 갈까. 오늘은 어느 길로 가볼까. 강물을 따라서 갈까. 저 내려오는 강물아,저 내려가는 강물아 그대 만나면 전해다오 사랑한다고. 못다한 말을 그대에게 전해다오. 난 떠나가네 길따라, 널 두고 가네 길따라, 오늘은 어느 길로 가볼까. 구름을 넘어서 갈까. 오늘은 어느 길로 가볼까. 기러기 따라서 갈까.
부르는 곳 없지만,오라는 곳 없지만 어디론가 가는 사나이, 말없이 떠나는 사나이. 기다리는 사람없는, 반겨주는 사람없는 낯설은 길 가는 사나이, 말없이 떠나는 사나이 웃음을 잃었을까. 슬픔도 잃었을까. 누구를 사랑했나. 누구를 떠났나. 가을 낙엽 밟으며, 가을 하늘 바라보며 정처없이 가는 사나이, 말없이 떠나는 사나이. 아무말도 하지 않지만 정을 두고 떠나가네. 눈망울이 빛이 날 때면 사랑을 남기고 가네.
냇물아 냇물아 어디로 가니. 냇물아 냇물아 어디로 가니. 냇물아 냇물아 어디로 가니 대답해 줄래. 니가 좋아서 나는 왔는데 어디로 어디로 가나 가나 가나. 떨어지는 은공이는 물방아 찧고 명쾌한 너의 노래 울려퍼지네. 한낮의 밝i은 빛이 너를 때리면 무지개의 오색을 자랑하누나. 해질녘 한가로움에 발을 멈추면 너는 나의 시 한 수를 거들어주네. 하얀 달을 맞이하여 하얀 옷자락 어느새 품안에는 선녀 품었네. 너는 왜 너는 왜 아래로 내려가느냐. 너는 왜 너는 왜 낮은 곳으로 가니. 모두다 모두다 높은 곳 올라오는데 너만이 너만이 왜 내려가느냐. 흘러라 흘러라 흘러라 흘러라 흘러라 흘러라. 흘러라 흘러라 흘러라 흘러라 흘러라 흘러라. 수만리 구비에 할 말도 많기에 수억년 내 소리 지금도 들리나. 냇물아 냇물아 어디로 가니. 냇물아 냇물아 어디로 가니. 나도 갈테야 나도 갈테야. 어허 냇물아 기다려다오.
하늘은 파랗게, 구름은 하얗게, 실바람도 불어와 부푸는 내 마음. 나뭇잎 푸르게, 강술도 푸르게, 아름다운 이 곳에 내가 있고, 네가 있네. 손잡고 가보자 달려보자 저 광야로. 우리들 모여서 말해보자 새 희망을. 하늘은 팍랗게, 구름은 하얗게, 실바람도 불어와 부푸는 내 마음. 우리는 이 땅 위에,우리는 태어나고 아름다운 이 곳에,자랑스런 이 곳에, 살리라. 찬란하게 빛나는 붉은 태양이 비추고, 하얀 물결 넘치은 저 바다와 함께 있네. 그 얼마나 좋은가? 우리 사는 이곳에, 사랑하는 그대와 노래하리. 오늘도 너를 만나러 가야지, 말해야지, 먼훗날에 너와 나 살고지고, 영원한 이 곳에 우리의 새 꿈을 만들어 보고파. 봄, 여름이 지나면 가을,겨울이 온다네. 아름다운 강산. 너의 마음은 내 마음, 나의 마음은 너의 마음 너와 나는 한 마음, 너와 나. 우리 영원히 영원히,사랑은 영원히 영원히, 우리 모두다 모두다 끝없이 다정해,
1938년 서울 출생. 작곡가, 기타 연주자. 그룹 '에드 훠 '(1964), 그룹 '블루즈테트' (1966 ?), 그룹 '덩키스'(1965 ?), '제로 악단'(1970),그룹 '퀘션스'(1970), '캄보 밴드'(1971), 그룹 '더 맨'(1971).그룹 '엽전들'(1973),그룹 '뮤직 파뭐'(1980), 그룹 '세 나그네'(1983) 등을 결성하여 활동. 영화 '푸른 사과' 음악감독(1965), 영화 '연인들' 음악감독(1975), 영화 '미인' 주연(1975)으로 활동. '신중현 오케스트라' 지휘자(1978), 용인 자연농원 축제에서 '신중현 팝스오케스트라' 지휘자(1989)로 활동 장미화(1964), 박인수(1967), 펄 씨스터즈(1965), 이정화(1969), 김추자(1969), 송만수< 1978), 임아영(1970), 장현(1970), 바니걸스(1971), 김정미(1971), 지연(1972), 김명희 (1974) 등에게 곡을 지어주며 스타로 만들어냄. 대표작므로 <빛속의 여인>(1964), <커피 한 잔>(1964), <님아>(1965), <봄비>(1969),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1969), <님은 먼 곳에>(1970), <거짓말이야>(1971), <마부타령>(1971), <아름다운 강산>(1972), <석양>(1972), <미련>(1972), <마른잎>(1972), <나는 너를>(1973), <봄>(1973), <바람>(1973), <선녀>(1973), <미인>(1974), <산아 강아>(1974), <어깨 나란히>(1974), <너만 보면>(1980), <그대는 떠나도>(1980), <내>(1983), <광복동 거리>(1983), <큰새>(1988), <잊지마>(1985), <너와 나의 노래>(1992) 등이 있음.
<b>2.신중현의 삶과 예술</b>
신중현은 1938년 1뭘 4일에 서을 중구 신당동에서 태어나 부친 신익균을 따라 만주로 갔다. 1945년 8월말 광복을 맞은 조국을 찾아 만주에서 귀국행 열차를 탔다. 서울에 도착한 신중현은 국어에 믹숙치 못해 한 학년 낮춰 1946년 국민학교에 들어갔다. 그후 6·25 전쟁으로 부친의 고향인 충북 진천으로 이사하였다. 당시 신중현의 부친이 많은 고충으로 인하여 병을 얻게 되어 신중현은 학교를 그만두고 몇년 동안 부친의 병 간호를 하였다. 그러나 부친은 세상을 떠나고 그 이듬해 모친 마저 세상을 떠났다. 소년 가장이 된 신중현은 동생 신수현을 친척 집에 맏겨두고 친척이 경영하는 제약 공장에서 일을 하며 야간학교를 다녔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소질이 있었던 신중현은 바이올린과 기타 등을 구하여 틈틈히 익히면서 AFKN을 들으며 외국음악을 듣고 외국 음악 교본을 독학했다. 그러던 중 자기의 앞날을 생각하여 어느날 기타 하나만을 들고 공장을 뛰쳐나와 서울시내의 음악학원과 음악감상실을 누비다가 결국에는 미8군 무대로 진출하게 되었다. 당시 신중현은 미8군에서 '재키', '히키' 또 '스코시'라는 애칭으로 불리울만큼 미군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었고 또한 1962년경 이교숙에게 음악이론을 사사받아 훗날 대작곡가로 대성하는데 밑거름을 마련했다. 지금까지 신중현의 작품이 담겨있는 음반으로 이 '무위자연' 음반 외에 총 191장<노래 반주용 레이저 디스크 33장 포함>이 확인되었으며, 170개의 신중현 문헌자료가 확인되었다. 신중현은 지금까지 약 300곡을 발표하였는데, 1969년부터 1974년까지 만 5년 동만에 무려 190여곡을 발표했다. 그는 한국 록 그룹을 탄생시키고 활성화지킨 장본인이다. 그가 결성하여 활동한 대표적인 그룹으로는 '에드 훠' (Add4, 1964), '블루즈 테트' (Blooz Tet, 1966), '덩키스' (Donkeys,1968), '제로 악단' (Zero, 1970), '퀘션스' (Questions, 1970), '캄보 밴드' (Combo Band, 1971), '더 맨' (The Men, 1971), '엽전들'(1973), '뮤직 파워'(Music Power, 1980), '세 나그네' (1983)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스타 제조기라고 불리울 만큼 여러 가수를 데뷔시켜 스타로 만들어냈다. 장미화(1964), 박인수(1967), 펄 씨스터즈(1966), 이정화(1969), 김추자(1969), 송만수(1970) , 임아영(1970), 장현(1970), 바니걸스(1971) , 김정미(1971), 지연(1972), 김명희(1974)가 그 대표적인 문하생들이다. 소박한 가사, 가사에 딱 들어맞는 곡조, 극도로 절제된 감정 표현, 억지로 멋부리지 않는 투박한 기타 연주가 신중현의 음악이 가지는 매력이다. 신중현은 <님아>, <미인>과 같은 삼천만의 주제가를 만들어 냈고 <님은 먼 곳에>, <석양>, <미련>, <잊어야 한다면> 등으로 만인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세대차이의 벽을 허물고 음악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만인의 기쁨과 슬픔을 어루만져 주었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강압에 의해 1975년 말부터 1979년 말까지 만 4년 동안 신중현은 음악을 등져야만 했다. 이 기간 동안 신중현은 떡밥 없는 바늘을 물속에 넣어둔 채 수평선만 바라보는 시간 보내기 낚시를 하며 지냈다. 그는 음악을 다시 할 수 있으리라고 꿈도 꾸지 못했다. 그에게서 음악을 빼앗은 것은 모든 것을 빼앗는 것과 다름없었다. 10. 26 궁정동 사건 이후 신중현은 다시 음악을 시작했지만 이미 그의 음악에 대한 집중력과 의욕은 심하게 상처받은 후였다. 그래서 1980년 이후에 발표된 대부분의 작품들은 어두운 곡조와 비관적인 가사로 되어 있다. 이런 곡들을 들으면 고난으로 가득찬 탄 예술가의 심정이 너무도 가슴 아프게 와 닿는다. "요즘은 들을 음악이 없다"는 중년층의 불평을 자주 접하게 된다. 그 때마다 "신중현의 활동이 끊이지 않았다면..."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신중현은 요즘 음반을 내기 위한 녹음과 작편곡으로 바쁘다. 그런 중에도 생활고 때문에 심야업소에 나가고 있다. 신명나게 곡을 써내던 신중현의 빛나는 눈을 다시 보게 되길 기다린다. 신중현은 한국록음악의 거목이며 한국대중음악의 국보라 할만큼 그가 국내 대중음악계에 끼친 공로는 실로 크다. 그는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음악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옛 음반들이 재발매되지 않아서 그의 명성에 비해 그가 지금까지 35년 동안 내놓은 음악들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음반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옛 작품 가운데 대표작들이 새롭게 편곡되고 연주되어 이렇게 음반으로 나오게 되었으니 참으로 뜻깊은 일이라 하겠다.
<b>3. 노자 사상을 담은 이 시대의 도덕경 '무위자연' 음반</b>
신중현은 노자사상에 심취해 있다. 그가 노자사상에 심취한 것은 험난한 인생살이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에서 얻어진 소산이었다. 6.25가 그를 소년 가장으로 만들고 굶주림과 설움을 주었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이 그를 무대에서 떠나게 했다. 대마초사건과 가요정화운동은 그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었다. 대마초사건과 가요정화운동이 신중현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었던 음악을 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대마초사건과 가요정화운동은 한국대중음악사에 있어서 가장 어두운 과거 중 하나로 회고되고 있다. 두 사건으로 인해 상승세에 있던 대중음악은 황폐의 길로 들어섰다. 두 사건이 발생한 데는 여러가지 충분조건이 있었다. 우선 대중음악을 낮추어 보는 그릇된 생각이 가회 전반에 팽배해 있었다. 그리고 장발과 청바지로 상징되는 젊은이의 음악은 그와 상반된 체질을 가진 박정희 정권의 신경을 자극했던 것이다. 그룹 사운드 음악과 포크 음악이 가요정화운동의 주된 표적이 되었던 것은 이런 점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었다. 인권이 짓밟혔고 가장 기본적인 언론의 자유도 보장되지 톳했던 것이 박 정권 시대의 모습이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선조의 정신, 예술 등이 종합적으로 농축되어 왔던 굿 문화 또한 미신타파라는 이유로 단시간 동안에 초토화 시켜버 린 박정희, 그는 검은 머리 위에 누런 가발을 덮어 쓴 테너가 영어로 노래를 부르고 관객은 부동자세로 앉아 있다가 노래가 끝나면 약속된 듯 동시에 박수를 퍼부어야 하는 오페라 같은 음막만이 품위있고 진정한 음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군사 정권이 우리 사회에 심어놓은 군사문화는 다양성을 잃게 했고 획일화된 문화를 만들어 놓았다. 1970년부터 시작된 장발 단속과 1973년 3월 10일부터 실시된 미니스커트 길이 단속이 박 정권 시대의 문화정책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삽화라 할 수 있다. 박 정권의 눈이 법의 척도였다. 권력의 횡포 앞에서 어떠한 불만도 마음대로 나타낼 수 없었던 대중은 불쾌한 정치와 현실을 잊기 위해서라도 음악감상 등의 취미에 빠져들어야 했다. 그러나 박 정권은 대중의 음악도 마저 빼앗아갔던 것이다. 1975년 6월, 정부는 대통령 긴급조치 9호를 발표했고, 대중예술활동에 대한 문화공보부의 정화 방침을 발표했다 이 정화 대책은 모든 공연예술에 대한 심의를 강화토록 하고 특히 대중가요에 대해서는 모두 재심을 실시해서 '국가안보와 국민총화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것', '외래풍조의 무분별한 도입과 모방', '패배, 자학, 비관적인 내용', '선정, 퇴폐적인 것'을 고르고 이미 나와 있는 음반까지 폐기토록 했다. 이에 따라 한국공연윤리위원회의 전신인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 <위원장 : 이항령 >의 기능과 영향력이 강화되어 잇달아 규제 조치가 가해졌다.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는 1975년 6-7월, 두 차례에 걸친 재심을 통해 88편의 대중가요를 방송, 공연, 판매 금지시키고 음반, 공연에 관한 사전 심의를 엄격히 하겠다고 밝혔다. 1975년 6월 21일, 43곡의 대중가요 금지와 1975년 7월 12일, 45곡의 대중가요 금지가 바로 그것이다. 정부의 이와 같은 정화대책 발표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작곡가와 음반회사였다. 작곡가들은 창작의욕이 꺾였고, 음반회사는 당시 2-5억원의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그리고 이중 심의기구로 구성된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와 방송윤리위원회의 지나친 검열로 인하여, 음악의 질이 떨어지고 개성없는 아류들만 판칠 우려가 있다는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음악뿐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쳐서 유신 정권의 그물망 같은 통제가 이루어졌다. 방송윤리위원회는 3편의 TV 드라마에 대해 불륜을 그려 물의를 빛었다는 이유로 경고 처분를내린데 이어,퇴폐적이고 선정적인 25편의 TV 광고를 방송 금지시켰다. 1973년 2월, 정부에서는 제 11차 영화법 개정을 통해, 영화 제작을 종래의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바꾸고 영화사의 신규등록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영화진흥공사를 설립하는 한편 영화 제작을 유신 정권의 이념에 맞추고 검열제도를 2중, 3중으로 강화하였다. 대마초사건은 일부 연예인들의 상습적인 대마초 흡연으로 인해 시작되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이것을 계기로 그간 자신이 불만스럽 게 생각했던 연예인까지 그 사건에 얽어매는 잘못을 저질렀다. 가요정화운동은 대마초사건 이후 시작되었다. 박정희가 거의 감정적으로 대중음악을 억압하니 대중음악계의 여러 협회에서는 겁이 나서 가요정화운동을 하겠다고 나섰다. 박 정권 이후에도 '가요정화운동'이라는 별난 운동은 계속 이어져서 음반에 일명 '건전가요'를 넣어야 했다. '건전가요'는 1980년대 말까지도 음반에 반드시 넣어야 했다. 그 때의 음반을 보면 '건전가요'라고 쓰여있는 곡 외에 다른 곡들은 마치 '불건전가요'라고 말하고 있든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아름다운 강산> 같은 곡이 함께 담겨있는 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박정희 정권 시대에 흔히 들을 수 있었던 노래가 <잘 살아보세>다. 박 정권은 <잘 살아보세> 풍의 노래만이 '건전가요'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노래를 문공부에서 총모하여 '건전가요'라고 뽑기도 했다. 1977년 11월에 문공부와 대한체육회가 공동으로 공모한 <국민응원가>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박정희는 1972년에 부하를 통해 자신의 노래를 지어달라는 뜻을 신중현에게 수차례 전달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래서 신중현사단 또한 거세의 표적이 되었다. 박정희가신중현엔게 요구했던 노래 역시 <잘 살아보세> 풍의 노래였을 것이다. 신중현은 새마초사건과 가요정화운동이 맞물린 박 정권의 대중가요 초토화 정책의 가장 큰 피해자 가운데 하나였다. 신중현은 대표곡이 거의 금지되었고 전성기에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금지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유치하고 억지 발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표절이라면 모를까 '창범 저속' , '가사 불민감 조장', '곡 퇴폐' , '방송 부적'이라는 것이다. 대마초사건 이후 신중현은 음악환동을 다시 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창작도 하지 않았다. 만약 박 대통령이 살아있다면 지금도 무대에 서지 못했을 것이라고 신 현은 말한다. 생명과도 같았던 음악을 할 수 없게 된 신중현, 그에게 힘을 준 것은 책이었다. 책은 우치에게 삶의 지혜를 일깨워 준다. 옛말에 사람 구실을 하려면, 가진 책을 수레에 실으면 수레를 끄는 소가 땀을 흘리고, 가진 책을 방안에 쌓으면 들보에 닿도록 가득 찰 정도의 많은 장서를 읽어야 한다고 했다. 톨스토이는 "지혜는 종교가 가르쳐 준다. 이 땅 위에 종교의 수가 일천이나 되지만 큰 줄기는 셋이다. 중국의 신앙, 신도의 신앙, 유럽의 기독교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종교 서적에는 일천 분의 칠 정도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인류의 온갖 지혜, 인류를 오늘날처 럼 만들어 놓은 모든 것이 들어있다" 고 했다 삶의 지혜를 일깨워 주는 이 세가지의 큰 줄기 가운데 신중현은 중국의 사상, 특히 노장 사상에 심취했다 신중현은 가요정화운동떼 의해 거세된 후 크게 낙심했다가 노자<老子, BC 5세기 >와 장자<裝子, BC 365-290)의 가르침으로 힘을 얻었다. 다음은 당시 신중현의 억울함, 분한 마음, 적개심을 삭혀주었을 만한 노자의 '부드러움이 굳셈을 이긴다'는 도덕경 36장이다.
마시려거든 반드시 꼭 베풀 거고 무르게 하려거든 반드시 꼭 단단하케 할 거고 그만 치우려거든 반드시 꼭 일으킬 거고 뺏으려거든 반드시 꼭 줄거니 이 일러 도<道>의 빛. 부드러움이 굳셈을 이김,우른 게 센 걸 이김. 물고기가 물 깊음을 벗어나지 못하듯이 나라의 날카로운 그릇을 가져 남에게 보이진 못해.
세상에는 상대의 법칙이 있다 역<易經>에서는 이를 음양의 이치라 한다. 지나친 오만은 좌절을 부르고 좌절은 분발을 부큰다. 기쁨 뒤에는 슬픔이, 슬픔 뒤에는 기쁨이 있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있다. 역사는 상대 세계의 되풀이로 이루어진다. 상대 세계의 법칙을 이겨내는 길은 무집착 뿐이다. 무집착은 서로 반대되는 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장자는 말한다. "샘물이 말라 물고기가 땅 위에 모여 서로 축축한 물기를 끼얹고 서로 물거품츠로 적셔줌은 물이 가득한 넓은 강이나 호수에서 서로 잊고 지내는 것만 못하다. 요제를 성군이라 칭찬하고 걸왕을 폭군이라 헐뜯음은, 둘 다 잊고 도<道>와 하나되는 것만 못하다." 그렇다. 노자와 장자의 가르침으로 신중현은 자신을 처단한 이들을 잊고 지내기로 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마음을 다스리니 마음이 편해졌뽀 방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신중현은 활동이 금지되 기 전까지 바쁜 음악생활로 인해 건강이 좋지 못했다. 빈틈없이 짜여있는 방송, 공연 스케줄, 그리고 술과 담배가 주된 원인이었다. 매 일같이 양주로 시 작해서 맥주와 칵테일을 거쳐 새벽에는 해장국과 함께 소주를 마셨다. 그리고 매일같이 담배 두 갑, 피로를 풀기 위해 감기약 7병을 먹었다. 그는 활동을 금지당하고 나서 노자와 장자의 가르침으로 힘을 얻어서 마음을 잡고 건강 관리에 힘을 썼다. 그간 공연 등으로 지쳐있던 몸을 생각해 1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채식을 했고 그 후 몸이 건강해진 후로는 왔칙적인 생활과 냉수마찰로 몸을 단련했다. 이렇게 해서 신중현은 가장 어려운 시 기를 잘 극복하였다. 신중현은 박정희 정권에 의해 주도된 대마초사건과 가요정화운동으로 인해 험난한 중년을 보내야 했다. 신중현은 이렇게 인생의 험난한 골짜기가 있었기에 '무위자연'이라는 이 거대한 봉우리를 가질 수 있었다. '무위자연'이라는 제목으로 내놓은 이 음반은 신중현이 음악계 데뷔 35주년을 기념하여 내놓은 역작이다. 이 음반에는 그가 35년 동안 정열을 바쳐온 음악 열정과 그의 인생관, 철학이 종합적으로 농축되어 있다. 신중현은 산과 물을 경애 한다. 그래서 그는 <아름다운 강산>, <산아 강아>, <내>와 같이 강과 산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지어 자연에게 흠모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기회주의와 이 기주의가 팽배해 있은 오늘날, 이리저리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찾아헤매는 인간사와는 달리, 산은 어떠한 것에도 유혹되 거나 흔들림 이 없이 한 곳을 묵묵히 지키며 우뚝 솟아 있다. 그래서 신중현은 산의 그런 꿋꿋한 지조를 경애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부귀공명을 쫓아 위로만 올라가려는 사람과는 달리, 물은 낮은 곳으로만 내려가는 겸손함이 존경스럽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자연과 내가 하나의 마음이 될 수 있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말한다. 하나<一>를 알아야 한다. 하나를 모르면서 둘, 셋, 넷, 다섯을 알려고 하면 얼이 나간 이 <얼간이 >며 , 얼이 썩은 이 <어리석은 이 >다. 하나 외에는 모름지기 <하나 외에는 모름 지키기 >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노자도, 공자도, 석가도, 예수도, 톨스토이도, 간디도 유영모도 진리 <道, 니르바나, 한아닌 > 하나만을 알기 위 해 부단히 노력했다. 진리는 둘이 있을 수 없고 오직 하나만 있다. 동서양의 진리가 다를 수 없다. 진리를 깨달은 성인의 가르침은 하나다. 한글 모음 중에 으<一>가 땅을 갛징하듯, 한자 중에 일 <一>이 대한민국, 중국, 일본, 미국, 아프리따 땅이 모두 같은 하나<一>의 땅임을 상징하듯이 사람은 모두 한 마음<一心>이 되 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왕안석 <王安石>은 "서로의 마음을 ill아려 한 마음이 되면 기쁨이 크다"고 하였다. 서로를 헤아리지 못하면 하나가 둘이 되고, 하나인 우주를 한울<한 : 큰, 울 : 동아리 -하늘>과 땅으로 나누어서 보게 되고, 하나인 대한민국 한민족을 남판과 북한으로 나누게 된다.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할 사람들이 편을 갈라 싸우고, 하나인 진리를 종교라는 이름으로 편을 갈라 싸우고, 땅에 국경을 긋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우주가 하나이거늘, 우주가 내 마음에 있거늘, 진리가 사람의 마음 속에 숨쉬고 있거늘 하나를 둘로 나누려고 하면 안된다. 너와 나로 구분지어 싸우는 일은 사람의 욕심에서 비롯된 잘못이요, 우주의 섭리에 역행하는 일이다. 마음을 비워 욕심을 버려야 우주와 내가 하나 된다. 우주가 하나인데 하나를 둘로 쪼개고 다시 둘을 셋으로 만드는 일은 하나 되는 것만 못하다. 모름지기 우주의 진리를 쫓아 하나 되어야 한다. 이 음반에는 철학이 담겨있다. 이 음반에서 신중변은 옛 성인들의 하나되자는 외침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음반은 음악으로 표현된 이 시대의 도덕경이라 평하고 싶다. 노자의 도덕경을 읽고 이 음반을 들으면 감동이 크리라 생각된다. 신중현의 작품에서는 한국적인 흥과 리듬을 느낄 수 있다. 그는 록 기타로 연주하지만 다른 나라의 록 기타 연주와는 다르게 한국적 인 맛을 낸다. 즉, 이태리 의 록을 들으면 칸초네 <Canzone> 향기가 나고 프랑스의 록을 들으면 샹송<Chanson> 향기가 나는 것처럼, 신중현의 록에서는 판소리 향기가 난다. 이 것이 신중현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이다. 신중현이 지금까지 발표한 300여곡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점은 바로 한국적인 맛이 있다는 것이다. 신중현은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font color="#400080">록이든,재즈든, 랩이든 한국적인 맛이 있어야지,외국 사람들이 하는 음악 그대로 모방하는 것은 결국 뿌리가 없는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중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듣는 음악을 하는 만큼 사명감을 가지고 있어야지, 인기나 돈에 너무 치중하면 안된다. 돈을 벌려고, 인기를 끌려고 미국음악을 그대로 모방하여 우리의 대중을 미국 문화권 안에 조여넣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그렇다고 양악을 무조건 배격하고 우리의 전통음악만 좋다고 말할 수도 없는 시대다. 왜냐하면 이제 대중적으로는 전통음악보다 양악이 더 인기있고 무시하지 못할 만큼의 영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너차피 외국음악이 이땅에 들어왔으니 그것을 우리 체질에 맞게 소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세계적으로도 각 나라마다 자신들의 민족적인 것을 살린 독창적인 음악을 하고 이를 타국에 알리는 작업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우리도 외국음악을 이땅에 심어나갈 때 모방하기 보다는 외국 것과 무언가 다른 우리의 독당적인 맛을 가이해야 할 것이다.</font>
최근에 한국전통음악과 양악을 접목시키는 노력이 활발하지만 대중의 반응은 썰렁하다. 서로 다른 조건에서 생성된 음악문화를 접목시키기란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음악은 여러 문화중에서도 한 나라, 한 지역, 한 마을의 문화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 지방마다 사투리가 있듯 각 지역마다 독특하게 형성된 음악문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먹는 것, 입는 것, 풍습, 쓰는 말이 각기 다른 지역에서 나온 음악들이 하루 아침에 접목되기가 쉽지 않다. 판소리 의 경우만 보더라도 과거에는 지역마다 여러 소리제가 있어서 중고제, 동편제, 서편제를 놓고 명창들마다 제 각각 다른 소리 이념을 내세웠다. 그리고 여러 소리제를 접목시키는 데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전통음악과 록을 접목시키고 그런 작품들을 대중적으로 성공시킨 신중현의 역량은 높게 평가받을 만하다. 신중현은 1971년부터 본격적으호 전통음악과 록을 접목시켜 왔는데 과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마부타령>(1971), <하필이면 그 사람>(1971), <소문났네 >(1971), <나도 몰래 >(1972), <어디서 어디까지>(1972), <미인>(1974), <할 말도 없지만>(1974), <저 여인>(1974), <그 누가 있었나봐>(1974), <생각해>(1974), <산아 강아>(1974), <어깨 나란히 >(1974), <너만 보면>(1980), <내>(1983), <즐거워>(1983), <떠나는 사나이>(1983), <길>(1983), <큰 새>(1988)를 꼽을 수 있다. 1982년 10월, 신중현은 대전 호텔 쇼무대에서 활동하면서 전기기타를 가야금과 같이 개조해서 가야금 연주과도 같은 전기기타 연주법을 한국식으로 개발한 바 있다. 그룹 '딥 퍼플' <Deep Purple >과 '레인보우' <Rainbow>에서 기타리스트로 활약한 리치 블랙모어 <Ritchle Blackmore>가 이미 오래전에 이런 식으로 지판의 나무를 깎아서 개조한반 있지만 리치는 실제 연주에서 큰 쓸모를 느끼지 못했다. 이렇게 개조된 전기기타는 지판이 없어서 음감을 잡기 힘들고 연주하기가 무척 까다롭기 때문이었다. 서양음악은 농현보다는 절대음을 내는 본래의 전기기타 외에 달리 전기기타가 필요없다. 그러나 한국전통음악에는 농현이라는 것이 있다. 농현은 손을 흔들어서 떠는 음을 내는 연주법으로서 기타 연주법으로 말하면 '벤딩' <Bending>이라고 할 수 있는데, 농현은 벤딩보다 훨씬 짙은 떨림음을 낸다. 이런 농현을 필요로 하는 경우에는 개조된 전기기타가 제격이다. 그래서 이 개조된 전기기타는 한국적인 록을 추구했던 신중현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이 '무위자연' 음반에는 한국전통음악과 록을 접목시킨 그의 대표작들이 집중적으로 담겨있다. 1994년 올해는 '국악의 해'로 지정되었다. 한국전통음악에 대찬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요즘, 이 음반은 전통음악의 새로운 발전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으며 외국음악의 바람직한 수용 방법론을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