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음반에는 '엄마야 누나야', '구두 발자국', '나뭇잎배', '섬집아기' 등 작은 시골학교의 어여쁜 여선생님과 낡은 풍금소리와 검정 고무신을 가슴 한 켠에 묻어두고 훌쩍 세월을 넘겨버린 어른들을 위한 동요가 아기자기 모여있다.
어둠이 들었다 불을 밝혀라
이성원의 노래 김진묵(음악평론가)
거대한 삶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것을 관조하는 수단으로 예술은 좋은 방법이 된다. 다시 말해 예술은 삶이라는 엄청난 병세를 풀어나가는 여러 방식 가운데 하나로 꽤나 긍적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음악에 있어서 예술성은 진지한 음악 행위와 결과 혹은, 부산물로 나타나는 것이다. 예술 자체가 목적인 것은 아직 미숙한 음악이다. 중요한 것은 음악가의 삶을 바라보는 '진지함'이다. 이 진지함에 공감할 때 우리는 '예술적 감동을 얻었다.'고 말한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도 듣는 이가 공감하지 않으면 의미없는 소리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적 논리만으로 사람의 미움을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듣는 이와의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작품, 즉 훌륭한 작품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진지한 자연 관조와 자기 성철이 우선하여야 한다. 예술은 이를 표현해내는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어처구니없는 현실에는 너무나도 많은, 예술을 추구하는 음악이 있다. 결국 우리는 예술 공해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상황에서 이성원의 노래는 가뭄 끝의 단비처럼 신선함을 전해준다. 그 신선함은 그의 음악 속에 깃듣 명상성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자연 관조와 자기 성철의 미학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을 바라보다 '얻어지는 ' 시와 노래
이성원은 작곡을 하기 위해 펜을 들고 책상머리에 앉지 않는다. 자연을 바라보다가 문득 시와 함께 노래를 얻는다. 즉흥적으로 직관에 의해 노래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노래는 고치거나 다듬을 필요가 없다.
어느 봄날, 나뭇가지 끝에 피어나는 나뭇잎을 바라보던 이성원은 태양을 향한 푸른 나뭇잎의 형상이 불꽃과 같음을 알았다. 자신의 삶이 불꽃과 같다고 느끼던 그는 나무가 된다. 언덕에 서서 황금빛 저녁을 맞이한 나무는 밤이슬을 맞으며 풀벌레 노랫소리를 듣는다. 나무는 갈증이 난다. 그러나 달빛 고운 하늘에서 단비가 내릴리 없다. 채념의 미학을 아는 나무는 '오지 않는 님' 대신 불어오는 바람의 속삭임에 허허로운 마음을 달랜다.
대나무를 그리기 위해 대나무를 바라보던 사나이가 결국 대나무가 되어버린 이야기가 있다. 그 사나이의 깊은 관조를 이성원에게서 본다. 관조는 애정어린 눈으로 볼 때에 가능하다. 나무와 내가 하나라는 것을 우주라는 전체성을 설명해야만 이해한다면 이는 답답한 일이다. 이성원은 그 전체성을 직관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의 많은 노래는 모두 이런 식으로 씌어졌다. 어둠을 응시하다 <말하라 어둠이여>, 밤이 지나가는 소리를 귀기울여 듣다 얻은 <이 밤에>, 멀고 먼 삶의 여정을 담백하게 그린 <보아라 수아>, 그리고 언어를 넘어선 의식의 세계에서 얻은 <비숑>과 <루디엥>같은 노래에서 우리는 그가 명상을 통해 얻은 메시지를 나눌 수 있다.
세상은 자구 우리를 화나게 한다. 물신자를 양산해내는 종교, 우리의 아이들을 망치는 교육, 그리고 기득권층을 위해 모두를 볼모로 한 제도들. 올바른 의식으로 바라본 세상은 너무 안스러워 눈물없이는 볼 수가 없다.
오늘도 산을 깎아내리는 개발 현장을 우회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산을 깎을 수 있어도 산을 만들 수는 없다. 화가 난 마음을 가다듬으며 이성원의 노래 <문밖에 봄빛은>을 듣는다. 이성원은 '에아! 꽃밭에 꽃이 피었느냐'고 묻는다. 그리고는 '어둠이 들었다. 불을 밝혀라'라고 불호령을 내린다. 우리에게 아직도 삶의 신비가 남아 있음을 본다.
[자료: "굿 인터내셔날 " 이성원 앨범 소개의 글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