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중에 녹음이 이루어진 푸르트벵글러의 베토벤 교향곡 녹음(일명 '우라니아판')이 두 박스로 선보였다. 제1박스로 선보인 푸르트뱅글러 지휘의 베토벤 교향곡은 교향곡 3번 '영웅', 빈 필하모닉(1944년 12월 19, 20일), 레오노레 서곡 3번, 빈 필하모닉(1945년 1월 28일), 코리올란 서곡, 베를린 필하모닉(1943년 6월 27, 30일), 교향곡 9번 합창, 베를린 필하모닉, 브루노-키테 합창단(1942년 3월 22일, 라이브레코딩)을 담았다. 특히 교향곡 제9번 합창은 이 지상에 환희의 성전을 높이 세우려 했던 베토벤 정신을 구현하고자하는 푸르트뱅글러 모토가 절정에 달한다.
푸르트벵글러와 베토벤 - 이순열(음악평론가)
사람들은 이따금 지휘자의 장수에 대해 이야기하고는 한다. 그렇다면 푸르트벵글러는? 68세의 생애가 짧았다고 한다면 무엇이 그를 다른 지휘자들보다도 일찍 죽도록 휘몰았는가? 몇몇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그는 과연 자살했는가?
"그렇다"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세상이 돌아가는 꼬락서니에 지쳐 마침내 살아갈 의욕을 읽고, 그 의욕상실이 그의 죽음으로 직결되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자살의 한 양태임에 틀림없다. 수많은 연주회장을 보라. 그곳에 우글거리고 있는 군상들 사이에 참으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저속한 문화 스노브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무리들이 푸르트벵글러가 아닌 카라얀을 선택했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해마다 연말이면 세계 곳곳에서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이 연주된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치루어지는 연례행사로 전락해버린지 오래다. 망년회랍시고 원숭이가 지휘봉을 휘두르고 돼지들이 모여 꿀꿀거리면서 목청껏 고함을 내질러보는 소란스러운 광란의 잔치와 무엇이 다르랴.
오 벗들이여, 이런 소리는 아니오!
(O, Freunde, nicht diese Tone.)
베토벤은 그렇게 호소한다. 그러나 베토벤의 그 비원을 연주자들에게 고취시키고, 그 불길이 청중의 가슴으로 전달되어 타오르록(feuertrunken)하는 지휘자가 몇 사람이나 있었던가. 그 극소수의 불새들 중 우리들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남아있는 지휘자야말로 푸르트벵글러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을 잃지 않고 되살아나는 불씨처럼 그의 열기가 번지고 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1886년 1월 25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비범한 재능을 보이자, 저명한 고고학 교수였던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집에서 개인교습을 받게 했다. 그는 피아노 레슨을 받는 한편, 고고학자 루드비히 쿠르티우스, 조각가 아돌프 힐테브란트를 비롯해서 발터 리츨러 등으로부터 광범위한 인물교육을 받았다. 베토벤에 관한 탁월한 저서를 남긴 리츨러 뿐만 아니라 조각가였던 힐테브란트도 베토벤에게 열광하고 있었기 때문에 푸르트벵글러는 아주 자연스럽게 베토벤에게 기울어 갔다. 19세 때에 브레슬라우 시립극장의 연습 지휘자로 지휘계에 등단한 푸르트벵글러는 뮌헨 궁정 오페라, 스트라스부르크 오페라, 뤼베크 오페라 등을 거쳐 29세 때는 만하임 오페라의 지휘자가 되었다.
1922년 근대 지휘계의 역사를 통해 가장 위대한 지휘자중 한 사람이었던 니키쉬가 세상을 떠나자, 푸르트벵글러는 니키쉬가 맡고 있었던 베를린 필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한꺼번에 맡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부터 푸르트벵글러의 신화가 구축되기 시작했다. 푸르트벵글러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에드빈 피셔는 그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는 지옥과 천국의 문 사이를 드나들면서 언제나 보다 더 음악적인 것을 찾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음악에 빛이 넘치는 신비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고야 만다. 그가 피아노 앞에 앉아 마음속에서 들었던 그대로를 우리에게 들려주었을 때, 그것은 더 할 수 없이 고귀한 계시였다. 그 통괄력을 흔히 '해석'이라 부르지만 우연히 그런 해석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작곡자와의 공감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는 오묘한 열매이다."
그는 악보를 충실히 재현하려고 하기에 앞서 악보속에 잠들어 있는 불꽃을 살려내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스스로 불타 올랐고, 그 열기가 청중들에게도 전달되어 그의 연주회에는 언제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 열기로 그는 음악을 움틀거리게 했고, 거센 힘으로 치솟아 오르게 했다. 그리고 그 격류에 간결되어 청중을 예기치 않았을 전율을 맛보게 된다.
첼리비다케는 "그가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홀 안은 온통 음악으로 가득차게 된다."고 말하고 나서 이렇게 덧 붙였다. "그런데 그의 레코드에는 그 마력의 그림자가 극히 일부분만 어른거릴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부분에서일망정 우리는 드높이 숨쉬고 있는 그의 혼백이 우리의 맥박으로 전해져 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푸르트벵글러에게 있어 베토벤이란 언제나 고양(高揚)하는 넋이었고, 참으로 아름다운 세계의 화신이었다. 그것은 계산기나 들고 깝죽거리는 난쟁이들로서는 결코 측량할수도 도달할 수도 없는 드높음을 향한 고양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몰락의 시대에 살고 있다. 온갖 난쟁이들이 살아 오르려는 새에게 화살을 겨누고 그 추락을 예찬한다. 인간이 더욱 안락해지기고 더욱 저속해지기 위해 기꺼이 진창속을 딩구는 구더기로 화해가는 시대, 언어로만 고뇌하고 언어로만 사색하고 언어기사들이 범람하고, 넋의 노래가 흐르게 하는 대신 갖가지 잔재주로 소리를 배합해내는 음률기사들이 음악가로 통하는 시대에 그는 사라져 갔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것이야말로 바로 그 시대적 변화였다. '소비자가 왕'이라는 허황된 관을 둘러쓰고 기를 쓰면서 물질의 노예로 전락해가던 시기(1954년)에 그는 쓸쓸하게 눈을 감았다.
하나의 조류가 밀려나고 또 하나의 조류가 밀어닥치면서 역사는 흐른다. 그러나 새로운 조류라 해서 언제나 낡은 조류보다 더 빛나는 것은 아니라는데 역사의 비극이 존재한다. 한 때 우리는 웅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