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아리아 음반<Romance>! 2003년 러시아 현지 녹음
음악에서 '로망스(Romance)'는 15세기 서정적인 발라드를 가리키면서 생겨난 말이지만, 그것이 대중화된 것은 낭만주의가 시작된 18세기 후반부터이다. 서로 비슷한단어 구조에서 알 수 있듯이 낭만주의 음악은 로망스의 본질적 정서와 맞닿아 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시정(詩情, Poesy)'이 넘친 노래 선율이다.
가곡과 아리아를 통해 낭만주의자들은 시가 지닌 서정성과 서사성을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기악에서도 로망스가 생겨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정은 낭만주의가 열망한 이상을 구체화한 표현이었고,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수단으로 작곡가들은 언제나 '노래'를 선호했다. 그 결과 '칸타빌레'(Cantabile, 노래하듯이)의 멜로디를 통한 기악 로망스가 다양한 형식 속에 태어난 것이다.
시정이 담긴 바이올린이나 피아노의 선율은 연주된다기보다 노래된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말의 억양에 가깝다. 이들은 시어만 주어진다면 언제라도 훌륭한 성악곡으로 변모할 수 있었는데, 작곡가들은 이런 점에 착안하여 '무언가(Song withoutwords)'라는 독특한 형식이 만들어내기도 했다.
김인혜와 같은 리릭 소프라노에게 낭만주의의 가곡과 아리아야말로 기성복과 같이딱 들어맞는 레퍼토리이다. 아울러 그는 기악의 로망스 역시 빼어난 가곡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앨범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시대와 지역, 형식을 달리하는 다양한 노래들을 통해, 반짝이는 시어와 대사들이 화려한 음률을 입고 따뜻한미감을 전달하는 것이다.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는 '무언가'의 효시를 존 필드의 야상곡(夜想曲, Nocturne)으로 보았다. 느리고 서정적인 가락이 시적인 분위기를 나타내고, 말 그대로 '밤에어울리는 선율'의 기능을 잘 발휘하기 때문이다. 필드에 이어 야상곡을 기악 장르로 확립한 프레데릭 쇼팽(1810-1849)의 작품 역시 가사가 없는 가곡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쇼팽은 야상곡을 통해 자신의 가장 은밀한 감정을 쏟아냈고, 깊은 상념이 반영된 칸타빌레 악구는 쇼팽 음악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21개에 달하는 쇼팽의 야상곡 가운데 Op.9-2 E flat 장조는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1830년에 작곡된 이 초기작은 필드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고 있다. 즉 오른손은 선율, 왼손은 반주의 역할을 하며 기악으로 연주하는 노래의 성격을 띤다. 특별히 곡에 어울리는 우리말로 지은 시어로 노래하는데 유려한 칸타빌레 가락은 첫 번째 트랙에서 연주되는 대로 우리말 가사를 붙이더라도 훼손되지 않는다. 작곡가 쇼팽은 이 작품을 프랑스의 피아노 제작자 카미유 플레옐의 부인에게 헌정했다.
피아니스트, 작곡가, 지휘자, 교육자로 19세기 러시아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안톤 루빈슈타인의 피아노 곡 역시 쇼팽의 야상곡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에 가곡의 시정을 담고 있다. 그가 1852년에 쓴 두 개의 멜로디 Op.3 중 1번은 루빈슈타인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연주되고 사랑받는 곡으로, 'F장조 멜로디'란 부제로 더 유명하다. 원래 피아노 독주곡이지만 말의 억양에 가까운 가락과 빼어난 선율미 때문에 오래 전부터 가곡으로도 불려왔다. 가사는 19세기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라즈마즈가 붙였다. 나이팅게일의 노래와 별 빛이 조화를 이룬 밤, 옛 사랑을 그리워하는 화자의 심정이 매혹적인 선율에 묻어 난다. 같은 작곡가의 '로망스' E flat장조 Op.44-1도 피아노 독주를 위해 것이다. 총 여섯 편으로 이뤄진 1860년작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저녁 음악회(Soirees a Saint-Petersbour)' 중 첫 번째 곡이다.앨범에서는 특별히 김인혜가 직접 노랫말을 붙인 버전으로 들을 수 있다. 사랑의 정열을 담은 가사가 매끄러운 오리지널 선율에 자연스레 녹아들며 호소력을 발휘한다. 가사와 선율의 상호 작용은 루빈슈타인이 훌륭한 가곡 작곡가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마침 '로망스'는 러시아에서 가곡을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작곡가 가브리엘 포레(1845-1924)도 평생 피아노와 가곡 장르에 천착했던 로망스의 작곡가. 포레가 피아노 작품 중에서도 노래의 성향이 두드러진 무언가나 녹턴을 많이 썼다는 것은 시에 깊은 애정을 보였던 그로서 무척 자연스런 일이다. 앨범에 수록된 세 개의 무언가 Op.17 중 1번은 앞서 세 작품과 달리 노랫말 없는 보칼리즈로 불린다. 가수가 특정 가사 대신 아(a) 발음의 모음창법을 택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 섬세한 프랑스어가 아닌 다음에야 포레의 가곡에 나타난 고도로 예민한 감각과 감상성(感傷性)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쇼팽에서 포레에 이르는 작품이 아담한 가곡으로서 말에 대한 세밀한 감각과 정밀한 기교를 중시했다면, 이어 연주되는 낭만주의 오페라는 가수, 특히 소프라노에게드라마틱한 표현력과 우렁찬 성량 등 보다 확대된 역량을 요구한다. 하지만 오페라아리아 역시 선율미를 중시한 작곡법 덕분에 근본적인 정서는 비슷하다. 특히 19세기초 이탈리아에서는 벨칸토(Bel Canto)라는 새로운 성악 조류가 나타나 선율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였다. 그 조류를 이어받은 베르디와 푸치니는 아리따운 선율에 주인공의 다양한 감정들을 깊이 있게 그려냈다.
자코모 푸치니(1858-1924)의 '토스카'는 여주인공의 희생에 의해 감동을 유발하는전형적인 푸치니극이다. 이틀에 걸친 사건을 다뤘으며 그만큼 빠른 전개가 돋보이고 살인, 치정, 고문 등 다양한 소재들이 양념처럼 들어가 있다. 2막에 나오는 '노래에 살고(Vissi d'arte)'는 드라마의 절정을 이루는 유명한 아리아. 로마의 경시총감 스카르피아는 카바라도시를 정치범으로 붙잡아놓은 상태에서 그의 연인인 토스카에게 구애한다. 애인을 살려야하는 고민에 빠져 부르는 아리아가 바로 이 노래이다. 착하게 살아온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는 토스카의 비애가 장대하게 펼쳐진다.
주세페 베르디(1813-1901)의 '신이여 평화를 주소서(Pace, pace, mio Dio)'는 신을 향한 평화의 갈구가 주제로, 1862년 작곡된 '운명의 힘' 중 4막에 나온다. 스페인 귀족 돈 알바로가 애인 레오노라의 아버지를 실수로 살해하면서 '운명의 힘'은 극 내내 두 주인공을 괴롭힌다. 끊임없이 우연과 필연이 반복되는 가운데 마지막 4막에 이르러 레오노라는 산 속 수도원의 수녀가 돼 있다. '신이여 평화를 주소서'는 모진 운명에 시달린 끝에 종교에 귀의한 레오노라가 신에게 평화를 갈구하는 드라마틱한 아리아이다. 화려한 테크닉을 배재한 채 숭고한 선율이 주인공의 고결한 심상을 반영한다. 하지만 가사와 가락 속에는 알바로를 향한 사랑과 그리움이 뜨겁게 녹아 있어, 그의 기도는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세속적으로 들린다. 노래에 앞서 등장하는 음울한 관현악은 전곡을 꿰는 '운명의 동기'이다.
푸치니의 아리아 중 특히 인기가 높은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O mio babbino caro)'는 앞선 노래들과는 다른 상반된 분위기의 밝고 아리따운 노래다. 단막 오페라 <잔니 스키키>에 나오는 이 곡은 여주인공인 라우레타가 아버지에게 리누치오와의 결혼 승낙을 받아내기 위해 부른다. "승낙을 안 해주시면 베키오 다리에 가서 아르노 강으로 떨어져 죽어버리겠다"란 가사가 음악에 비해 매우 통속적이다. 전체줄거리도 사기를 쳐서 유산을 횡령한다는 내용으로 '비극의 작곡가' 푸치니답지 않아 보인다. 단테의 '신곡' 중 1부 지옥 편에서 제재를 취해 1918년 완성했다.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의 독일 오페라는 이탈리아에 비해 선율의 비중이 낮고 여주인공이 여걸의 이미지를 자주 띠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바그너가 벨리니의 벨칸토를 동경했다는 사실은 여러 일화를 통해 입증되고 있으며 그의 음악에도 실제로 벨칸토 양식의 아리아가 자주 발견된다. 바그너가 아직 악극 시기에 접어들기 전인 1845년에 쓴 '탄호이저'에는 벨칸토 소프라노와 유사한 여주인공 엘리자베트가 등장한다. 그가 2막에서 부르는 '그대 고귀한 전당이여(Dich teuer Halle)'는 서정적이며 부드러운 프레이징에 바그너다운 힘을 보탠 인기 아리아이다. 비너스의 품으로부터 연인인 탄호이저가 발트부르크의 노래의 전당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에 가슴 설렌 마음이 활기찬 노래와 반주에 묻어있다.
이탈리아의 벨칸토의 전통은 푸치니를 거쳐 베리즘(사실주의 오페라)에 이르면서 단절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하지만 작곡가들은 주요 아리아에서 여전히선율에 기반을 둔 작법으로 듣는 이의 감정을 자극했다. 다만, 확대된 반주와 강렬해진 드라마에 맞서 가수들의 소리가 거세지고 둔중해졌다는 점이 특징. 베르즘의 중심에 있던 움베르토 조르다노(1867-1948)는 '안드레아 쉐니에'(1896)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프랑스 혁명기 실존 시인인 쉐니에의 불운한 삶이 소재. 3막에 나오는 '어머니는 죽었소(La Mamma morta)'는 여주인공인 맛달레나가, 애인 쉐니에의목숨을 미끼로 사랑을 바치라는 제라르의 요구에 비참한 자신의 운명을 슬퍼하며 부르는 절절한 아리아이다. 정황상 토스카의 아리아 '노래에 살고'와 매우 유사하다. 다른 점은 노래에 감동을 받고 셰니에의 목숨을 지키겠다고 나선 상대방의 행동이다. 이 곡은 영화 '필라델피아'에 삽입되어 인기를 끌었다.
피에트로 마스카니(1863-1945)의 단막극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중 '어머니도 아시다시피(Voi lo sapete O Mamma)' 역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주인공의 심정이 가득 담긴 아리아이다. 애인인 투리투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긴 산투차가 투리투의 어머니인 루치아에게 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애절하고 처연한 멜로디가 일품이지만, '어머니는 죽었소'와 달리 상대인 루치아의 공감을 끌어내진 못한다. 이 작품은 레온카발로 작곡의 <팔리아치>와 함께 대표적인 베리즈모 오페라로 꼽힌다. 두 작품은 길이가 짧기 때문에 보통 하루저녁 동시에 상연된다. 이탈리아 오페라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선율미에 박진감 넘치는 성악과 관현악이 일품이다.
토스카와 같이 푸치니의 '나비 부인'도 여주인공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고통을 부여했다. 여기서 헤로인인 초초상을 옥죄는 상황은 믿었던 미국인 남편 핑커톤의 변심, 주인공의 나이는 불과 열 다섯이지만, 극의 무게에 걸맞게 시종 스태미나넘치는 발성을 구사해야한다. '어떤 갠 날(Un bel di vedremo)'은 정절을 최대의 미덕으로 간직한 일본 여인이 남편이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부르는 2막 아리아로 전곡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믿음은 핑커톤이 돌아온 듯한 환영과함께 달콤한 꿈을 일으킨다. '틀림없이 돌아올 것'이라고 외치는 절정부는 전곡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하다.
오페라를 통해 극대화된 감정의 발산을 선보인 가수는 다시 낭만주의 리리시즘의 정수를 담은 가곡 작품으로 돌아온다. 미국의 작곡가 앨버트 헤이 말로트(1895-1964)가 작곡한 'The Lord's Prayer'는 주기도문을 그 가사로 채용한 곡이다. 작곡가는 발라드 형식을 이용하여 2차 대전 중 세계의 평화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단순하면서도 차분하게 시작하여 점점 고양되는 악상이 감동적이다. 잠시 조용한 분위기를 잡다가 "영원히 권세와 영광이 있사옵니다, 아멘"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루며끝난다.
정치근 시의 '금강산'은 한상억이 최영섭의 칸타타를 쓴 '그리운 금강산'과 함께 명산의 화려한 자태를 담은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시에 의한 가곡은 여러 편이 존재하는데, 이 음반은 특별히 볼쇼이 극장의 지휘자이자 이 음반의 지휘와 편곡을 담당한 블라디미르 보고라드(1938-)가 새로 붙인 선율을 선보인다.
국민 가곡으로 이름 높은 '비목'은 유럽의 낭만주의 가곡 전통에 우리 역사와 한을 결합한 작품이다. 1964년 철원 비무장지대에 배속된 초급장교 한명희(현 서울 시립대 교수)가 초가을 오후 순찰 중 이끼 낀 돌무덤 하나를 발견하고는, 6.25때 죽은 무명용사의 것임을 직감했다. 나중에 해주 태생의 작곡가 장일남(張一男, 1932-)이 그에게 작사를 의뢰했을 때 한명희는 20대의 나이에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계곡에서 외롭게 죽어갔을 돌무덤의 주인공을 떠올리며 그에 대한 헌시를 써내려 갔고, '비목'은 그렇게 해서 탄생 게 되었다. 적막 속 두려움과 전쟁의 비참함, 그 때문에 더욱 간절한 향수가 4분의 4박자 안단티노(조금 느리게) 선율에 서정적으로 녹아있다.
앨범의 마지막은 바그너의 감미로운 기악곡이다. 그의 1840년에 쓴 'Albumblatte' E장조는 '무언가'라는 부제가 딸려 있는데, 원래의 연주 형태인 피아노 독주뿐 아니라 바이올린이나 다른 악기를 위해 자주 편곡된다. 음반에는 지휘자 보고라드가 편곡한 관현악과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버전으로 실려 있다. 독일어 'Albumblatte'(영어로 Album leaf)는 직역하자면 악보집의 갈피 삼아 끼워 넣는 마른 나뭇잎이다. 보통 지인들에게 헌정하는 간단한 악곡에 붙이는 명칭이 되었다. 바그너는 피아노를 위해 모두 4개의 'Albumblatte'를 작곡했는데 여기서 연주되는 곡은 첫 번째 작품으로 후원자인 키츠(Kietz)에게 헌정되었다. 느릿한 선율에는 전편의 성악과 상통하는 로맨틱한 정감이 가득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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