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 서거 250주년 기념음반. 반세기동안 연주했던 카를로 베르곤찌의 윤기있는 울림,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제 2의 작곡가로 평받는 카잘스의 웅대한 연주, 그리고 그의 인간적인 면이 느껴지는 예술혼
그동안 첼로의 대표적 명연으로 여겨졌던 카잘스의 <무반주 첼로 조곡> 전곡이 출반되었다.
카잘스는 15세 무렵 어느 고서점의 낡은 악보를 발견한다. 그 때부터 그는 그 작품을 홀로 연주하기 시작했고, 1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그 작품의 내면을 파고 들었다. 공개석상에서 첫 연주를 시작하고, 그로부터 다시 40년이 지난 후(1936-1939년) 최초로 녹음해 200년이나 잠자고 있던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탄생시켰다. 본 앨범은 음반사 HMV에서 에스피(SP)음반으로 나오고, HMV가 없어진 뒤, 복각전문레이블인 포노엔터프라이즈(Fono Enterprise)사에서 이 음원을 디지털 마스터링 기법인 체다 사운드 시스템으로 복각해 발매되었다. 굿인터내셔널의 모노폴리는 포노와 계약해 이를 국내에서 생산해 해외판권을 가지고 역수출한다. 최신 잡음제거 방식을 이용했기 때문에 비교적 깨끗한 소리로 카잘스의 전설적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Pablo Casals the 6 Cello Suites (J. S. 바흐 - 무반주 첼로 모음곡)
6곡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바흐의 자필악보가 분실되어 언제 어떤 연유로 작곡되었는지 분명치 않다. 다만 안나 막달레나(1730)와 요한 페터 켈너(1726)의 필사본이 남아 있어 적어도 1726년 이전의 작품이라는 것은 명확하다.
쾨텐의 궁정악장직에서 1723년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 칸토르로 자리를 옮긴 바흐는 처음 몇 년 동안 종교음악을 작곡하는 데 전념하였다. 그러므로 라이프치히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하기는 어렵고 바흐에게 가장 행복했던 쾨텐 시절의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바흐의 쾨텐 시절이야말로 수많은 기악곡의 걸작들이 쏟아져 나왔던 때였다. 뿐만 아니라 바흐는 쾨텐 궁전에서 감바 및 첼로 연주자로 활약하고 있었던 크리스티안 페르디난드 아벨과 크리스티안 베른하르트 리니히케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염두에 두고 이 걸작을 썼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아직까지 독주악기로 충분한 뿌리를 내리지 못했던 첼로를 위해 바흐는 왜 무반주곡을 쓰려고 했던 것일까?
바흐가 셍뜨 꼴롱브와 꾸브랭의 비올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흐는 거기서 출발하면서도 새로운 차원으로 그의 창조세계를 확대해 갔다. 바흐는 아르페지오라든가 중음주법, 그밖에 갖가지 오묘한 방법으로 첼로라는 악기 속에 감춰져 있는 화성의 신비를 끌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손을 맞잡고 음악의 화원을 향해 걸어 간다는 것은 황홀한 일이다. 그러나 아무도 곁에 없을 때 스스로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서라도 우리는 그 반향을 지긋이 음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득히 먼 곳의 별빛이 흐려 있을 때, 높이 떠오른 달은 스스로의 달무리로 빛의 화음을 창조해낸다. 바흐가 중음주법으로 선율악기에 화성적인 기능을 부여했던 것은 달과 달무리의 화합과도 같다.
선율악기로 하모니를 추구한다고는 하지만 첼로와 바이올린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우선 첼로는 음색의 화려함이나 다채로움에 있어 바이올린에 미치지 못하고 활놀림에 있어서도 바이올린만큼 자유롭지는 못하다. 뿐만 아니라 중음주법도 바이올린에 비해 제약이 있어 푸가와 같은 충실한 폴리포니의 도입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렇기는 하지만 바이올린이 근접하기 어려울 만큼 심오한 세계의 표출은 첼로로서만 가능하다. 저현의 깊숙한 내면으로 침잠하면서 잉태한 무한한 정적과 빛의 세계,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극상(極相)이다.
프랑스 모음곡, 영국 모음곡, 파르티타 등과 마찬가지로 무반주 첼로 모음곡도 6곡이 한 무리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바흐의 다른 모음곡들과 마찬가지로 네 개의 기본 무곡, 즉 알르망드, 꾸랑뜨, 사라방드, 지그 등이 기본 골격을 이루고 있으나, 6개의 모음곡 모두 전주곡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각 모음곡에 따라 메뉴엣, 부레, 가보뜨 등의 무곡이 추가되기도 한다.
알르망드는 어원적으로 독일풍의 무곡이란 의미지만, 원래 프랑스에서 발전하여 16세기 중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장중한 독일풍의 취향이 곁들여진 중용적 템포로 연주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바흐의 음악에서는 그 장중함이 드높은 격조로 승화되어 있다.
꾸랑뜨는 달린다는 뜻의 프랑스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경쾌하게 흐르는 3박자 계통의 춤으로서 알르망드와 대조를 이룬다.
사라방드는 스페인에서 생겨난 춤으로 원래는 격렬한 사랑을 표현하는 춤이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유럽의 다른 나라로 유입되면서 그 성격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고, 특히 프랑스 궁전에서는 우아한 춤곡으로 순화되었다. 그러다가 바흐의 모음곡에서는 환상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찬 시로 화했다.
지그는 영국에서 발달한 쾌적하고 빠른 무곡으로 활력에 넘쳐 모음곡 전체의 클라이막스를 이룬다.
그러나 바흐의 모든 모음곡에 있어서 이러한 무곡들은 한결같은 색조를 띄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모음곡 1번 G장조의 알르망드는 장중하다기보다 우수의 빛을 띄는가 하면 3번 C장조의 알르망드는 훨신 더 부드럽고 포근하다. 그런데 바흐는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무곡을 표면적인 듯 그대로 '춤추기 위한 곡' 으로 꾸민 것일까?
이 모음곡 중의 어느 무곡도 춤을 추기에 알맞는 곳은 없다고 사람들은 생각해왔다. 그리고 이 무곡에 맞추어 춤을 춘 무용가도 별로 없는 편이다.
그렇다면 춤을 추지 말라는 무곡인가? '그렇다' 고 잘라 말하기도 어렵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라면 도대체 어쩌자는 무곡인가? 이에 대해 멜러즈(wilfrid Mellers)는 이렇게 주장한다.
"무곡은 무곡이되 육신을 위한 무곡이 아니라 넋의 무곡이다."
그렇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정적의 빛 속에서 고독한 넋이 열락에 겨워 그지없는 춤을 펼쳐가는 넋의 무곡이다.
카잘스와 무반주 첼로 모음곡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채 버려져 있는 이끼 낀 고성, 오로라 공주는 그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100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그 고성을 찾는 왕자가 있었다. 난마처럼 얽혀 있는 가시덤불을 헤치고 왕자가 공주를 포옹했을 대 공주는 비로소 그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이것은 페로가 쓴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라는 동화 이야기지만,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또한 오로라 공주처럼 오랜 동안 망각의 이끼 속에 잠들어 있었다.
1825년, 작곡된지 100여년 만에 출판되기는 했으나 이 작품에 진지한 관심을 표명했던 사람은 별로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별로 재미도 없는 '첼로 교본' 쯤으로 생각하면서 거들떠보지도 않은 것이다.
그런데 1892년 깊은 망각의 잠에 빠져 있었던 이 무반주 첼로 공주에게 접근했던 왕자는 카잘스라고 하는 16세 소년이었다.
카잘스는 1876년 스페인 카탈로니아 지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성당 오르가니스트여서 어려서부터 음악적인 환경에서 자라났고 4세 때에 피아노, 7세 때 바이올린, 그리고 9세 때에는 오르간을 배웠다.
그 어느 악기도 카잘스를 흡족하게 해주지 못했으나 11세에 이르러 첼로를 처음 들었을 때 그는 비로소 이 악기야말로 그가 택해야 할 숙명적인 악기임을 깨달았다. 그는 훗날 이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순간 나는 숨이 막힐 듯 했다. 그 소리에는 뭔가 너무나 부드럽고 아름다운, 그리고 인간적인 것이 있어 나는 그 광휘에 온통 휩싸이고 말았다."
당시에는 첼리스트의 위상이 오르가니스트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미미한 것이어서, 아버지는 첼리스트가 되려는 아들의 뜻을 좀처럼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카잘스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고향에서 40마일 쯤 떨어진 바르셀로나의 음악원에 입학하여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곳을 거쳐 15세 때에는 마드리드의 음악원에 입학했는데 그가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악보를 접하게 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어느날 그는 고서점에서 낡은 악보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 악보는 빛이 바래고 낡았으나 어떤 광휘를 뿜어 내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 악보를 집어 들었을 때 그의 온몸은 떨리기 시작했다. 마치 보물섬의 동굴에서 숨겨진 보물상자를 발견한 듯한 심정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그 작품을 홀로 연주하기 시작했고, 10년이 넘는 오랜 세월에 걸쳐 그 작품의 갖가지 가능성을 파고 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매 그는 그 작품을 공개석상에서 연주하기 시작했으나 그가 그 전곡을 녹음한 것은 그로부터 다시 40여년이 지난 후(1936-39)였다.
그리하여 기껏해야 소수의 첼리스트에게 첼로의 기교를 극복하기 위한 연습곡 정도로 알려져 있었던 6곡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카잘스 한 사람의 끈질긴 노력으로 햇빛을 보았고, 마침내 그는 그 모음곡이야말로 바흐가 남긴 가장 위대한 불후의 걸작임을 세상에 알렸다.
"음악은 나에게 있어 바다와도 같은데 나는 그 속에서 그 무한한 의미도 모른 채 헤엄치고 있는 작은 물고기에 불과하다."
카잘스는 항상 스스로의 역할에 대해 이렇듯 겸허한 자세를 취하고는 했다. 그러나 그 무한한 바다속에 무반주 첼로 모음곡과 같은 휘황한 산호섬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그 광휘에 찬 세계를 우리 곁에서 가까이 느껴 볼 수 있도록 해 준 존재야말로 그 '작은 물고기' 였던 것이다.
"카잘스는 바흐가 역사 속의 영광이 아니라 가장 완벽하고 가장 근대적인 음악가였다는 것을 이해했던 최초의 연주자였다" 고 이자이는 말했지만, 카잘스가 얼마나 바흐를 사랑했고, 바흐가 그의 생애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지는 다음과 같은 카잘스 자신의 말 속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바흐의 기적은 어느 다른 예술에도 나타나 본 적이 없다. 성스러움이 드러날 때까지 인간성을 파헤치며, 가장 덧없는 것에도 영원의 날개를 돋게 하는 것이 바흐의 음악이다. 뿐만 아니라 성스런 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인간적인 것을 성스럽게 했던 이야말로 바흐이며, 바흐야말로 음악이 있어온 이래 가장 위대하고 순수한 인간이었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카잘스 아닌 다른 음악가에 의해서 그 진가가 밝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해도 미이라처럼 잠들어 있었던 그 악보에 카잘스 아닌 누가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고, 다시 싱싱한 피가 흐르게 했을 것인가? 오늘날 무수한 첼리스트가 제각기 다른 제나름대로의 해석으로 이 작품을 연주하고 있다 해도 그들 모두 카잘스로부터 출발하고 있음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카잘스의 바흐 연주는 히말라야의 준봉 아니면 무한한 바다에서나 느낄 수 있는 그 장쾌함 속에서 때로는 천지를 진동하는 듯이 굉음을 내면서 꺼져내리는 누사태와도 같은 처절함이 있는가 하면,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고고한 준봉이 치솟기도 하고 거센 파도가 산산히 부서지는 붕괴가 있는가 하면, 인간의 고뇌를 잠재우는 잔잔한 물결이 무한한 평화를 안겨주기도 한다. 바흐의 그리고 카잘스의 그 모음곡 속에는 산과 바다의 온갖 신비, 그리고 장엄한 드라마가 얽혀 있다.
때로는 격렬함이 지나쳐 거칠게 느껴지기조차하는 카잘스의 연주에 대해 더러는 극적인 긴장감을 지나치게 부각시켰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데이비드 모어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카잘스처럼 확고한 신념으로 이 작품의 진주에 접근한 연주는 찾아보기 어렵다. 악구 하나 하나가 우리의 기슴을 깊이 파고 들어 무한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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