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경치], [나의 가역반응], [속꿈, 속꿈] 7년에 거쳐 완성된 서사의 마지막이자 가장 이른 이야기.
2017년, 신해경의 EP [나의 가역반응]이 발표되었다. 2020년, 신해경의 정규 1집 [속꿈, 속꿈]이 발표되었고 2024년, 신해경의 정규 2집 [이상한 경치]가 발표되었다. 신해경의 디스코그래피 중 콕 집어 소개하는 세 앨범은, 프리퀄 - 본편 - 시퀄의 구조를 취한다. 각각 [이상한 경치] - [나의 가역반응] - [속꿈, 속꿈]으로 서사가 이어진다. 본편으로 시작하여 시퀄을 소개하고, 가장 마지막으로 프리퀄을 소개하기까지 7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긴 시간에 거쳐 완성된 이야기를 동경하며 7년 동안의 청자로서, 또는 창작자의 대체자로서 글을 보탠다. 창작자의 거대한 이야기를 헤아리는 데에 보다 친절한 안내가 되기를 바란다.
발매 한 달 전, “아직 수정해야 할 요소가 많은데, 그래도 앨범을 이해하기에 무리 없는 수준이라고 생각한다.”는 짧은 문자와 함께 가믹스 버전의 음원 9트랙을 받았다. 메일에 함께 적혀있던 신해경의 개인적인 소회: “이야기에 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아가려 노력하는 화자를 그려야 했다. 그 부분이 가장 힘들었다.” [이상한 경치]의 화자는 알 수 없지만, [나의 가역반응]과 [속꿈, 속꿈]을 들은 청자와 창작자는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 이야기의 끝은 결국 그대와의 몰락이며, 그대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곳은 꿈결뿐이라는 것. 끝을 안 채로 [이상한 경치]를 듣는 동안 꽤 많은 눈물이 흘렀다. 또는 끝을 안 채로 [이상한 경치]를 만들었을 창작자를 가정하며 마음이 아팠다. 그럼에도 끝을 안 채로 이 앨범을 듣는 것, 창작자가 의도한 바다.
01 요람으로
모든 서사의 시작이자 그대와의 만남을 그리는 트랙이다. 아직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다가올 트랙들은, 이제까지 신해경의 음악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사랑과 만남의 이야기를 오롯이 전개한다. 그럼에도 불안함은 있다. “있잖아 다신 볼 수 없어도"와 같은 가사를 기어이 쓰고야 만다. 가사는 필연적으로 창작자를 닮는다고 했다. 여담, 신해경은 평상시에도 잦게 속을 태우는 사람이다. 다시, 가사는 필연적으로 창작자를 닮는다고 했다. 신해경이 쓰는 가사는 수더분하다. 수더분함으로부터 믿게 되는 마음들이 있는데, 이 트랙에선 “나는 숨길 줄도 몰라요”의 반복이 그러했다.
더불어 신해경의 전작에선 비중이 크지 않았던 건반이 거의 유일한 악기로 등장하며, 이번 앨범에서 전개될 사운드의 구성을 예측하게끔 한다.
02 에스테르
Estelle, 페르시아어로 별을 뜻하는 단어다. 신해경의 음악엔 유독 꽃과 관련한 장면이 많다. ‘종이꽃 정원', ‘꽃 피는 계절처럼' 등 곡명에 직접 언급하기도, ‘제라늄', ‘라일락'처럼 가사 이곳저곳에 등장시키기도 한다. (라일락은 미발매 곡 ‘러브'에 등장한다.) 신해경의 음악에서 ‘꽃'이 슬픔을 짐작하는 매개체였다면, 이번 앨범에선 ‘별'로 그 반대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앞서 단출한 악기 구성으로 수줍은 마음을 내비쳤던 사운드는, 2번 트랙에서 폭죽이 터지듯 확장되며 사랑이 이루어진 순간을 그려낸다. 사랑은, 혼자서 거닐었던 밤을 그대와 발맞춰 걷게 되는 과정이다. 신해경은 에스테르, 별을 등장시킴으로써 흐릿했던 밤하늘에 의미를 부여한다.
03 물고기
어느 종교의 설화 속 신이 등장하는 장면처럼 맑은 날 그대가 ‘내려오'고, 여느 신의 능력처럼 어두운 밤을 그대가 ‘비춰준'다. 이야기의 화자에겐 그대가 곧 신과 같다. 실례로, 물고기는 여러 종교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신해경은 신앙이라는 거대한 관념을 사랑에 비유한다. 사랑이란 절대적으로 믿고 받드는 일이다.
개인적인 소회: 사랑을 노래하는 곡에 물고기라는 제목을 붙인 창작자에 대해 생각했다. 신해경은 가사에서 반복되는 구절을 곡의 제목으로 낙점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곡명을 먼저 결정하고, 은유적으로 풀이하여 신해경만의 해설을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것은 나의 가정.
04 웨딩
밤하늘에선 별을 보기가 쉽지 않다. 신해경은 ‘별'이라는 관념을 떠올리면 꿈을 꾸는 것 같다고 했다. 지상이 너무 밝은 탓에 충분히 어두울 수 없는 밤하늘에서, 또렷한 별을 보는 일은 누군가에겐 꿈과 같은 것이다. 이번 앨범에서 신해경은 별을 자주 등장시킴으로써 사랑이 갖는 낭만적 이미지를 전달한다. 앨범의 타이틀곡인 ‘웨딩'은 별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가장 화려한 곡명을 갖고, 이야기의 정점에 위치하며 제 역할을 한다. 다소 고루한 의견일지라도, 사랑의 내러티브에서 결혼이라는 서약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를 부정할 수 있을까?
05 악몽
만남의 순간부터 영원을 약조하는 결실까지 완성됐다. 잊었을지도 모르는 사실, 이번 이야기는 결국 그대와의 몰락으로 끝난다. [속꿈, 속꿈]의 첫 번째 트랙, ‘회상'을 연상시키는 사운드가 시작된다. 이어서 등장하는 ‘다나에', ‘권태', ‘모두 주세요'의 흔적은 [나의 가역반응]을 이야기 안으로 끌고 온다. 이제부터는 불길함을 잊지 말고 이야기를 관람할 시점이다.
06 종이꽃 정원
앨범의 선공개 격으로 먼저 공개되었던 곡이다. 발매 당시, 앨범의 분위기를 헤아릴 수 있도록 톡톡한 역할을 했던 ‘종이꽃 정원'은 여러 곡들과 함께 수록되며 또 다른 변화를 거쳤다. 짧아진 곡 길이와 한층 화려해진 사운드는 ‘악몽'의 뒤에 배치됨으로써 더욱 극적으로 대비된다. “어떤날 꿈에 본 제라늄" 앞서 화자의 꿈에 등장했던 제라늄은 시든 제라늄이다. “난 슬픈 꿈은 잊을게요" 시든 제라늄을 보았던 화자에겐, 영원히 시들지 않을 종이꽃 정원이 필요하다. 여담으로, 신해경에게 이제껏 등장한 제라늄은 무슨 색인지 물었다. 대답은 빨간 제라늄이었다.
07 메론향
“메론이 먹고 싶소.” 시인 이상이 임종 시 남긴 말로 알려졌다. 신해경의 이름에서, 음악에서 꾸준히 언급되었던 이상의 흔적은 이번에도 등장한다. 신해경은 좋아하는 이들의 흔적을 숨겨놓거나 드러내는 데에 적극적이다. 어떤 날을 ‘어떤날'로 적는 한결같음이 그러하고, 동명의 ‘담다디'라는 곡을 발표하는 것이 그러하다. 한껏 치달았던 앨범의 서사와 사운드는 ‘메론향'을 맞이하며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신해경은 시인 이상이 임종 시 남긴 말을 가져왔다. 죽음을 맞이할 때의 고요한 순간, 화자와 그대는 죽음으로 대변된 순간을 고요히 맞이했다.
08 영원아카이브
‘영원'을 아카이브 한다. ‘웨딩'에서 품었던 영원은 이제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것이 되었다. 아무 뜻도 없이 사라지는 그대를 흘려보내지 않기 위한 행위를 한다. 어느 영화의 장면을 떠올린다. 사라져가는 것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엇 하나라도 붙잡기 위해 몸부림하는 장면을 상상한다. 도중에도 화자는 “함께 누워 손을 잡고 다음을 기약하길" 바란다. 끝은 부정할 수 없다. 화자의 선택, 끝을 받아들이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을 것을 소원한다.
*영원아카이브는 대구에 위치한 카페 이름을 빌려왔다.
09 어디서 오는가
앨범의 마지막 트랙이다. “오늘은 따라갈래요, 안 된단 말은 하지 말아요" 익숙한 가사가 등장한다. [나의 가역반응]의 ‘권태'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이상한 경치]가 [나의 가역반응]의 프리퀄임을 선언한다. 신해경은 [이상한 경치] - [나의 가역반응] - [속꿈, 속꿈]이 하나의 이야기임을 여러 번에 거쳐 친절하게 드러낸다. 가사를 인용하거나 기타리프를 가져오는 등의 장치가 이곳저곳에 묻어나 있다. 자, 이제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거대한 이야기를 어떤 순서로 수용할지, 당신의 감상이 궁금하다.
글: 이지영
프로듀스 : 신해경
작사, 작곡, 편곡 : 신해경
연주, 레코딩, 프로그래밍, 믹싱 : 신해경
마스터링 : 강승희 @소닉코리아
앨범 디자인, 아트워크 : 하혜리
뮤직비디오 : 우용
파트너 : 팀비스포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