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펑크 / 하드코어 밴드 소음발광의 2024년 신작 《불과 빛》
선공개 싱글 〈검은물〉
라이너노트 : 사랑해야 하는 소음들
— 단편선(오소리웍스)
6월이었다. 새 앨범의 레코딩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이어진 작업의 마지막 순서로 이번 앨범의 프로듀서인 최태현의 집에서 보컬과 함께 이런저런 실험적인 소리들을 녹음하기로 했다.
태현의 집은 언덕배기에 있다. 길을 오르다 보니 희미하게 음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집에 다다를수록 소리는 높고 커졌다. 여기 사람 사는 데 아닌가. 집 앞에서 전화를 하니 태현과 동수가 내려왔다. 바깥에 다 들리더라고. 이래도 돼? 특유의 온화한 말투로, 태현이, 아무도 신경 안 쓰던데, 하고 씨익 웃었다.
작업실 문을 여니 이펙터, 일렉트릭 기타, 앰프, 마이크 같은 것들이 아무렇게나 늘어놓아져 있었다. 작업대와 레코딩 부스가 딱히 분리되어 있지 않아 모두 한 방에 있었다. 한쪽 구석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가볼게요, 하더니 태현이 헤드폰을 쓰고 녹음 버튼을 눌렀다. 잠시 정적. 순간 앰프에서 어마어마한 크기의 소음이 발생했다. 눈이 동그래졌다. 반사적으로 귀를 막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둘은 진지했다. 이내 소음이 멎었다. 태현이 헤드폰을 벗고 말했다. 좋은데요. 동수도 배시시 웃었다. 태현 님, 저도 좋아요.
나는 음반제작자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아티스트의 음악을 누구보다 빠르게, 심지어는 스케치 단계부터 만날 수 있다는 건 이 일의 큰 매력 중 하나다. 내 프로덕션에서 나오는 음반은 주로 내가 직접 프로듀싱하지만 이번 작업에서는, 음악은 태현이, 텍스트나 비주얼 같은 다른 일은 내가 맡기로 했다. 잘 맞는 옷을 지어 입히는 일이다. 그러려면 우선 많이 들어야 한다.
소음발광의 출세작, 아이코닉한 전작인 《기쁨, 꽃》의 라이너노트에서 김학선 음악평론가는 이렇게 썼다.
“《기쁨, 꽃》에는 소음발광의 모든 음악적 여정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 모두를 한 장의 앨범 안에 두루 담아내고 조화시키고 있다. 1960년대 선샤인 팝과 사이키델릭으로 시작해 1970년대 펑크를 거쳐 1980~90년대 꽃을 피운 인디 록, 노이즈 록, 포스트 펑크, 스크리모, 포스트 하드코어, 그리고 2000년대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까지 이들이 좋아하고 동경해온 음악의 요소들이 담겨 있고 때로는 블랙메탈 같은 익스트림 메탈의 정서까지 품고 있었다.”
《불과 빛》은 《기쁨, 꽃》과 닮은 앨범이기도, 하지만 상당히 다른 앨범이기도 하다. 포스트 펑크를 중심으로 다양한 시대, 그리고 다양한 국적의 록 음악이 하이브리드 되었다는 기본적인 컨셉은 비슷하다. 하지만 이 앨범은 더 어둡다. 더 둔탁하다. 잔뜩 헝클어졌다. 이런 무드나 뉘앙스의 변화를 떠나서도, 기존의 앨범들이 ‘라이브의 성실한 기록’에 가깝다면, 이번 작업에서는 보다 ‘작품’으로서 접근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다르게 쓰자면, 우리는 이 앨범을 보다 ‘영화적’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여러 이유에서 무언가를 선공개해야 하는 경우, 대개는 앨범을 대표할 수 있는 곡을 선택하고는 한다. 그게 가장 일반적이며, 일반적인 데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검은물〉은 앨범을 대표하기는커녕, 도리어 이질적인 트랙이다. 새 앨범의 노래 중 가장 느리고 가장 비어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가장 먼저 선보이고 싶기도 했다. Black Sabbath의 초기작을 연상케 하는 무미건조하고 퍼석거리는 질감의 드럼. 텅빈 사운드 속에서 홀로 읊조리는 보컬. 천천히 검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주술적인 무드까지. 이 트랙에는 지금껏 소음발광이 보여주지 않았던 매력이 가득하다.
나는 이 트랙을 들으며 Nick Cave나 David Bowie의 어떤 노래들, 또는 한국 인디록의 시원 중 하나인 코코어의 느린 사이키델릭 록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 모든 맛이 하나의 트랙에서 모두 느껴진다는 것 또한 재미있다.
그 맛을 같이 느끼고 싶다.
《기쁨, 꽃》의 끝에는 함께 한 동료들—기태, 보경이, 기영이—와의 헤어짐이 있었다. 《불과 빛》의 시작에는 새로운 동료들—성빈, 성규, 재현, 그리고 개인적인 삶의 변화로 일찍 팀을 떠나게 된 아연—이 있었다. 혼자 남은 동수, 그리고 소음발광을 여럿이 걱정했다. 하지만 동수는 소음발광의 이름을 지켰다. 그리고 새로운 ‘우리’를 구성해 다시 무대에 섰다.
내게 소음발광의 두 번째 앨범은 아름다운 앨범이다. 세 번째는, 내게는 사랑스러운 무언가로 느껴진다. 만화가 요시나가 후미를 좋아한다. 한국에서는 『서양골동양과자점(앤티크)』로 유명한 작가다. 그의 것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는 『사랑해야 하는 딸들』이다. 만화도 좋지만 제목도 아름답다. 어쩐지 자연스러운 문법이 아님에도 머릿속을 하염없이 맴도는 제목이다. “사랑해야 하는”이라니. 인용으로 글을 끝마치고 싶다. 소음발광은 내게 ‘사랑해야 하는 소음들’로 느껴진다. 그건 아마 당신도 그러할 것이다. 이 사랑을,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