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다가올 날들만 기대하게 만드는!
게이트플라워즈 [Majors of Minors]
7곡의 새 노래와 9개의 잼 편린이 담긴 마스터링 음원을 받았다. 첫 곡은 단순히 ‘Jam 13’이라는 제목이 붙은 3분 30초짜리 곡이었다. 그리고 필자는 단번에 네 명의 멤버가 녹음실에서 진행하는 리허설 현장으로 순간 이동했다. 박근홍은 예의 날 선 목소리로 즉흥 멜로디를 쏟아내고, 와와 페달을 맛깔나게 밟아대는 염승식의 기타 연주는 이인산이 단단하게 만든 베이스 라인 위에서 자유롭게 노닐고 있으며, 심벌과 스네어로 리듬 키핑을 넘어 자기 색을 만드는 전상진의 드러밍이 또아리고 있다. 즉흥 연주라는 사실이 무색할 잼의 한 대목에 슬그머니 앉았다가 스르륵 빠져나간다. 그제야 깨달았다. “게이트플라워즈가 진짜 돌아왔구나!” 밴드의 민낯이나 다름없는 잼 트랙을 이렇게 자신 있게 내놓는 “똥배짱”을 여전히 떵떵 부리며 말이다. 반갑다. 그리고 고맙다. 우리 인생에 멋진 43분을 새로 추가해줘서.
1. 정규 2집으로
2014년 EP [늙은 뱀]을 끝으로 활동을 멈췄던 게이트플라워즈(이하 게플)가 2022년 복귀를 타진하더니, 2023년 공식 복귀를 선언했다. 물론 기다리다 지쳤던 많은 팬이 쌍수를 들고 반가움을 표했다. 하지만 게플이 과연 앨범 제작과 라이브 활동까지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지속할 수 있을지 걱정하던 팬도 많았다. 그 중에는 필자도 포함된다. 보컬리스트 박근홍과 기타리스트 염승식은 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던 사이이지 않은가. 거기에 새로운 멤버로 소개된 드러머 전상진과 베이시스트 이인산이 과연 예전 게플이 들려주던 특유의 그루브를 살려내며 새로운 게플로서의 합까지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래서일까 게플은 클라우드펀딩 방식으로 싱글과 정규앨범, 공연을 제작하겠노라 선언한다. 밴드가 이뤘던 과거의 성취에 빠져 자만하지 않겠다는, 그리고 반드시 제대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이겠다는 배수의 진이라도 치듯. 게플이라는 이름의 밴드가 처음 무대에 서기 시작했던 바로 그 클럽 FF에서 재개된 게플의 공연 현장을 찾는 관객들은 새롭게 뭉친 네 명이 만드는 합이 과거와 닮았으면서도 유연하게 진화한 형태라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2023년 7월 31일 신곡 ‘All In’이 발표되었다. 신곡 하나 발표될 줄 알았던 싱글은 데뷔 EP처럼 밴드가 즉흥으로 진행한 잼까지 (CD의 경우) 9곡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밴드는 정규 앨범 발매로 예정했던 9월을 한참 넘겨 10월 이후에야 길고 지난한 녹음을 시작했다. 녹음은 무중력소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뮤지션이자 엔지니어인 김영수가 운영하는 무중력연구소에서 진행되었다. 잼과 작곡이 병행되었다. 잼은 밴드 멤버들이 서로가 그리고 있는 음악에 대한 심상의 단편을 소리로 주고받는 경험이다. 그렇게 공유된 감각과 소리는 누군가의 손을 거쳐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 – 곡으로 갈무리되게 마련이다. 이번 앨범 [Majors of Mi-nors] 작업에서 각자의 심상을 그러모아 노래로 만드는 역할은 염승식이 맡았다. 하지만 편곡은 (대부분) 다시 공동의 작업으로 이뤄졌다.
2. 소수의 입장이 다수가 되는
앨범 수록곡 대부분을 마이너 코드로 만들어서, 또 소수가 된 밴드 사운드로 다수의 위치에 서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앨범 제목 [Majors of Minors]에는 중첩되어 있다. 돌아온 게플의 자신감과 각오가 저릿하게 전해진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Jam 13’을 지나면 ‘Empire’가 기다린다. 와와 페달로 만든 짜릿한 기타 리듬 커팅과 묵직한 베이스, 단단한 드럼 연주가 만드는 소리의 서사는 박근홍의 말맛 나는 가사를 거치며 더 절절하게 살아난다. 밴드는 개별 곡의 가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고 설명하지만, 노래가 이리저리 배치되고 사이사이 잼 트랙이 더해지면서 [Majors of Minors]가 들려주는 하나의 서사로 완성된다.
‘Jam 13’이 생존 신고였다면 ‘Empire’와 ‘Desire’는 10년의 헤어짐과 재회의 이야기다. 성공과 오만, 몰락과 상처, 그리고 다시 날아오르려는 바로 지금, 여기만이 진짜라는 사실을 아로새기면서 말이다. 해먼드오르간과 신디사이저는 그 과정의 페이소스를 특유의 울림으로 표현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마이너 코드로 진행되는 펑키(funky)한 연주를 새롭게 도약하겠다는 욕망으로 표현하는 박근홍의 목소리까지 게플의 표현력이 어떻게 성숙했는지, 동시에 여전히 날것인지 확인시켜주는 노래들이다. 거칠게 내뱉는 박근홍의 노래와 코러스 사이의 호흡, 기타 솔로와 얽힘까지 놀랍다. 염승식의 기타 연주 사이로 리듬과 멜로디를 다잡는 이인산의 베이스 연주는 몇 번을 들어도 감탄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펑키한 ‘Jam 14’를 쥐고 가는 베이스 연주에 맞춰 리듬 커팅과 보컬 잼이 치고 들어오면 드럼은 전체를 갈무리한다. 두 편의 군침 도는 잼을 들으며 곡으로 완성되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다 보면 멜로디를 한껏 살린 기타 연주가 필인의 쾌감으로 가득한 드럼과 함께 솟아오르는 ‘Fever’가 펼쳐진다. 거친 탁성과 가성을 오가며 “Hold me now so I can feel”을 외치는 목소리는 게플의 현재와 오버랩 된다. “Hold me”를 외치던 보컬은 이제 아예 “끝없는 수렁에서 제발 꺼내줘”라며 더 적극적으로 몸부림치는 현재를 표현한다. ‘Fever’에 이어 비장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Hero’는 마치 한 곡처럼 연결되며 다시 소수가 된 현재의 서사다.
3. 이제는 느낀대로
퀸의 뉘앙스가 흐르는 ‘Jam 17’을 시작으로 앨범은 반전을 시작한다. 와와 페달과 펑키한 리듬 커팅은 이번 앨범 속 염승식의 연주를 압축하는 단어라 할 수 있는데, ‘Frank’는 단적인 예다. 이 기타 리듬과 멜로디가 전상진의 드럼과 박근홍의 목소리와 만나면 얼마나 스트레이트한 록으로 변신하는지 확인하는 것도 즐겁다. 그런지의 직선적인 분위기로 돌아간 ‘Jam 18’이 에너지를 한껏 끌어올리면 앨범에서 가장 캐치한 코러스로 흥을 다잡는 ‘The Day Will Come’이 절정으로 향한다. 그런지 시대에 대한 회고이기도 하지만, 염승식의 선명한 기타 솔로나 박근홍의 “다가올 날 바라는 날 바로 지금 곧”을 외치는 가사가 더해지면 게플이 팬들과 무대 위에서 나누고 싶은 감정이 무엇인지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베이스가 주도하는 잼 사이로 기타 멜로디가 더해지는 ‘Jam 19’에 담긴 염승식, 전상진, 이인산의 합주는 게플이 추구하는 연주의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특히 후반부 전상진의 드럼 연주는 단순하면서도 압도적이다. 좋은 연주자 넷이 만나 넷의 소리를 훌쩍 넘어서는 순간이 록 음악의 본질임을 앨범에 담긴 잼 트랙에서 날 것의 모습으로 제대로 확인할 수 있다. 잼 트랙이 이 앨범을 진짜로 만들어주는 이유다.
“우리의 날들은 또 다시 펼쳐진다”며 게워내는 ‘한잔’은 앨범 전체에서 가장 전통적인 록 사운드다. 애니멀스 버전의 ‘House Of The Rising Sun’과 1980년대 김현식의 분위기가 공존하는 ‘한잔’은 항상 낯간지러우면서도 대체할 말이 없는 “한국적”인 록에 대한 질문과 답처럼 느껴진다. 장기하와 얼굴들 출신의 이종민이 담당한 해몬드오르간 사운드와 전기피아노 연주는 단단한 밴드 연주에 애잔함과 두려움을 살짝 입혀낸다. 덕분에 게플의 미래에 대한 밴드의 고민, 걱정, 어려움 사이로 다시 뭉친 기쁨과 환희가 뒤섞인 감정이 소리로 표현된다. CD로 음반을 듣는 이에게는 즐거움과 두려움이 배배 꼬인 마지막이 아닌 다시 날아오르는 거친 두 편의 잼을 더 만날 수 있다. 마치 즐거움과 두려움이 꼬여 만들어진 새 게이트플라워즈라는 밧줄은 팽팽하고 짱짱하니 걱정하지 말자고 혼잣말을 되내는 밴드를 지켜보는 기분이다.
0. 오직 다가올 날들만
김영수의 레코딩과 믹싱은 날것의 소리가 지닌 힘을 잃지 않으면서도 탄탄하고 매끈하게 매만져져 있다. 팬들이 오랫동안 기다린 게이트플라워즈로 부족함이 없다. 나아가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더 단단해진, 또 지난 2년 동안 게플 멤버로 새롭게 단련한 멤버 하나하나의 역량이 더해지는 순간 순간의 감동이 짙게 묻어난다. 밴드의 소리가 어떤 건지 아는 밴드 멤버와 아티스트의 요구를 이해하는 엔지니어가 작업할 때 나오는 시너지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흥미진진한 사례다.
시너지의 모습은 꼼꼼한 오버더빙과 한 방에 거칠게 녹음한 소리가 혼재된 소리를 통해 알 수 있다. 날카롭고 무겁지만 세련된 록으로 귀결되는 결과물, 미려한 펑키와 우직한 록이 아무렇지 않게 만나며 독특한 그루브를 한가득 쏟아내는 장면들 말이다. 믹싱을 왜곡 없이 담아낸 마스터링도 만족스럽다. 절망의 시간, 재기의 다짐, 불완전함에 대한 두려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다가올 날의 문을 향해 걸어가는 밴드의 소리를 표현한 커버아트까지. 마이너의 자리에서 게플과 게플을 잊지 않은 팬들의 힘만으로 만든 메이저의 소리다. 마이너 속의 마이너가 들려주는 그들만의 툭박진 진짜 메이저 사운드를 (다시) 만난다.
조일동 (음악취향Y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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