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hni' - [Paradise]
'안토니 앤더 존슨즈 (Antony and the Johnsons)'의 '안토니 헤거티 (Antony Hegarty)'는 자신의 여성 인격이라 할 수 있는 '아노니 (Anohni)'라는 이름으로 새 출발한다. 그간 독특한 가성과 세계관으로 수많은 이들을 감동시켜온 '안토니'는 '아노니'라는 명의로 작년도에 [Hopelessness]라는 충격적인 결과물을 내놓았다. 이는 테러나 사형제도, 그리고 환경 파괴에 대한 정치적이고 공격적인 가사로 일관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이전 '안토니 앤더 존슨즈' 시절과는 다른 편성의 작법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해냈다. 과거의 평온한 소리에 심취해 있던 이들에게 [Hopelessness]는 어쩌면 꽤나 당황스러운 변화였을 지도 모른다. 과거 소규모 오케스트라를 바탕으로 슬프고 부드러운 곡들을 만들어온 '아노니'는 마치 '뷰욕 (Bjork)'처럼 자신의 곡을 최첨단 사운드로 포장해냈다. 이는 보통의 아티스트에게 있어서는 위험한 도박일 수도 있었지만 '아노니'는 이러한 난관을 간단하게 풀어냈다. 아니, 오히려 이런 변화는 필연적이었다는 느낌 마저 들었다. '아노니'는 두 명의 조력자와 함께 [Hopelessness]를 작업해냈는데, '칸예 웨스트 (Kanye West)'와의 협업으로 유명한 '허드슨 모호크 (Hudson Mohawke)', 그리고 실험적인 트랙들을 주로 만들어온 '원오트릭스 포인트 네버 (Oneohtrix Point Never: 이하 OPN)'를 각각 기용한다. 이 워프(Warp) 출신의 두 젊은 재능을 통해 '아노니'는 소리 세계를 확장시킬 수 있었다. '아노니'는 멜로디와 가사에 집중했고, 정밀한 트랙 메이킹의 경우 온전히 이 두 사람에게 위임했다.
[Paradise]
'희망 없음'을 의미하는 앨범 타이틀 [Hopelessness]와는 비교적 반대되는 의미를 지닌 [Paradise]라는 후속 EP를 발매했다. '안토니' 시절부터 항상 정규 앨범 이전, 혹은 이후에 같은 세션으로 완성한 나머지 곡들을 EP로 발매해오곤 했는데, 이를테면 [The Crying Light]와 비슷한 시기 발매된 EP [Another World]의 경우 두 장 모두 부토 무용가 '오노 가즈오'의 사진을 표지에 구성해내는 식이었다. 이번의 경우에도 [Hopelessness]와 마찬가지로 '허드슨 모호크', 그리고 'OPN'가 전곡 프로듀스 했다. [Hopelessness]와 [Paradise] 사이, 미국은 '버락 오바마 (Barack Obama)'에서 '도널드 트럼프 (Donald Trump)'로의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아노니'에게는 더욱 절망스러운 상황일 텐데, 이 혼란의 시대를 맞이해 '아노니'는 [Paradise]라는 제목을 채택한다. 하지만 이는 여전히 공격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공포와 경외감, 그리고 위안과 위협이 한데 얽혀있는 디스토피아 적 삶을 묘사해낸 작품으로 이전 앨범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날이 서있는 형태로써 완성되어 있다. 참고로 '아노니'는 [Hopelessness]를 통해 올해 열리는 브릿 어워드에서 '여성 솔로 아티스트'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앨범 커버에는 -'아노니'를 포함한- 다양한 인종과 나이의 여성 아홉 명을 배치시켜냈다. 이 커버를 두고 '아노니'는 '페미니즘 오라클 (Feminine Oracle)'이라 표현해냈는데, 이 여성들의 경우 '아노니'의 공연 도중 뒤에 배치되어 있는 화면에 영사되기도 했다. 맨 위 오른쪽에 위치한 인물은 '아노니'의 "Obama" 뮤직비디오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며, '아노니' 사진의 경우 "I Don`t Love You Anymore" 비디오에 출연했던 모습의 스틸샷이다. 이 커버 사진에는 없지만 과거 "Marrow", "Crisis"의 비디오 역시 여성 한 명의 얼굴만을 비춘 채 노래를 립싱크하는 형태로 구성해내고 있었다. 앨범의 타이틀 곡 "Paradise"의 비디오가 먼저 공개됐다. '콜린 휘테커 (Colin Whitaker)'가 연출한 영상으로 모델로도 활약하고 있는 비쥬얼 아티스트 '엘리자 더글라스 (Eliza Douglas)'가 운전도중 노래를 립싱크하는 형태의 비디오를 담아냈다. 이 곡의 경우 앨범에서 유일하게 '허드슨 모호크'와 'OPN'가 협업해낸 트랙으로, 곡의 비트는 '허드슨 모호크'가, 그리고 구부러진 보컬 이펙트의 경우 'OPN'이 각각 분업해냈다.
[Hopelessness]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논쟁적인 곡들을 채워내고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파괴하고, 빈곤을 창출하며, 또한 인권을 유린하는 이들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는 "Jesus Will Kill You"가 차가운 금속 비트와 함께 전개된다. 특히 비열한 자본가에게 던지는 곡의 마지막 가사가 압권이다. "예수가 당신을 죽일 것이다 / 당신의 안락한 좌석 / 당신의 부드러운 얼굴 / 당신의 보호받는 자녀들 / 예수가 죽일 것이다." 자살 충동과 분노를 담아낸 우울증의 발라드 "You Are My Enemy"에서는 상반되는 감정을 쏟아내고 있으며, "Ricochet"에서는 자신의 두려움으로 인해 끊임없이 전능한 신을 저주한다. 지구의 변화, 그리고 손실에 대해 중의적으로 노래하는 "She Doesn`t Mourn Her Loss", 곡 제목만큼이나 꿈을 꾸는 듯한 올겐으로 전개되는 "In My Dreams" 등 묵직한 리듬과 날카로운 비트에 결코 지지 않는 '아노니'의 목소리가 인류에게 경종을 울린다. 이 떨리는 음성은 무서운 존재감을 지닌 채 음악을 듣는 이들의 두뇌, 그리고 가슴에 사정없이 꽂힌다.
정작 여성의 이름으로 개명했음에도 '안토니' 시대보다 훨씬 공격적이고 급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아마도 현재 '아노니'를 둘러싼 실제 사회 분위기가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더욱 강한 의지로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1971년 영국에서 출생해 이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미국 캘리포니아, 그리고 뉴욕 등을 전전하며 살아온 '아노니'는 여러 지역, 그리고 세계 정세를 피부로 체감해왔고 때문에 보다 광범위하게 세상의 진실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한 전 지구적 메시지는 이번 작품에도 고스란히 녹아 들어있다. 이 억센 음반을 듣다가 "Do They Know It`s Christmas?"나 "We Are the World" 같은 것을 비교해보면 이것들이 그저 한가한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전자음과 정치적 가사의 충돌을 통해 활동가들의 발언을 지원하고 있는 본 작 [Paradise]는 확실히 대중음악에 대한 고정관념을 파괴하고 있다. 이전 작만큼이나 '아노니'와 '허드슨 모호크', 그리고 'OPN'의 합이 기대 이상으로 충실하다. 신비로운 기운과 참신한 스케일은 물론, 작품이 지닌 농도 또한 더욱 강해졌다. '아노니'가 혼신을 다해 토해낸 [Paradise]에서 우리는 더욱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인간사회의 부조리, 그리고 분노를 뼈아프게 체험할 수 있게 된다. - 글: 한상철 (불싸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