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원은 1986년 정기적인 개인콘서트를 크리스탈 문화센터에서 열며 자신의 음악빛깔에 덧칠을 해나갔다. 창작곡으로 꾸며진 데뷔음반<문을 열고 나서니-아세아,1987년>은 제작사의 야심에 찬 홍보전략으로 제법 촉망 받는 인기가수의 꿈을 키우게 했다.
그러나 방송국 PD에게 촌지 봉투가 오가는 것을 보자 음악보다 돈이 우선하는 현실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실 1집은 이성원의 국악적 향내를 철저하게 지워내는 편곡으로 제작된 평범한 앨범이었다.
그는 ‘솔직히 음반을 낸다는 욕심에 상업적으로 타협했다’고 고백한다. 이후 상업적인 음악활동과는 거리를 두며 우리가락을 포크와 접목하는 음악실험에 몰입하며 즉흥 창작 무용곡에도 빠져들었다. 1988년 겨울 평택에서 새벽 산책을 나갔다가 동화처럼 신기한 경험을 했다.
소들이 숨쉴 때마다 내뿜는 하얀 김이 장관을 이루자 만져보고 싶어 다가갔다. 소들이 기겁을 하며 달아나자 돌아서기 섭섭해 즉흥적으로 노래를 부르자 흩어져있던 소들이 신기하게도 스스로 뿔을 들이대거나 혓바닥을 내밀며 몰려들었다.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그의 손길을 받아들이자 우리 가락은 자연과의 교감이 가능하다는 가슴 뻐근한 감동이 밀려왔다.
신비로운 경험은 더욱 자유로운 음악 날갯짓으로 1989년 첫 국악 가요 발표회로 이어졌다. 2집<나무밑에서-서울음반,1991년>은 자신의 음악색깔을 고스란히 담은 사실상의 데뷔 음반이다. 이정선이 편곡작업을 거들고 김두수는 기타 세션으로 힘을 실어 주었다.
그러나 한편의 시나 다름없는 수록곡 <밭>의 절제된 가사는 ‘말이 안 된다’는 이유로 심의에 걸렸다. ‘2집 발표 후 골수 팬들이 생겨나 지금까지 묵묵하게 도와주는 후원자가 있다.
올해 발표한 2장의 신보도 그 분의 도움으로 가능했다’고 말하는 이성원. 수록곡 <보아라 수야><구름타령><밭>은 1980년대를 수놓을 만한 한국적 가락의 정통 포크곡들이다.
오선지의 틀조차 깨기 위해 한 음 한 음 직접 기타 줄을 튕기며 곡을 만드는 그의 창작작업은 독특하기만 하다. 이성원은 2집 발표 후 활기찬 활동으로 국악가요의 영역을 넓혀 나가던 중 1993년 인도의 명상음악과 조우하는 음악적 전환점을 가졌다.
‘제 3세계음악의 폭풍'이라 불리며 미국과 유럽을 발칵 뒤집었던 인도의 세계적 거장 라즈니쉬와 아쉬람 현지 공연에서 인도 라가풍의 명상음악과 우리민요가락의 충돌은 황홀한 불똥을 튀게 했다. 이때부터 이성원은 인도음악에 대한 관심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1996년 어느 날. 일본의 한 유명가수가 그의 음악에 관심을 보이며 찾아왔다. 우리가락을 배우겠다는 열의가 예뻐 음악을 가르쳐 주었지만 그의 음악을 도용해 음반을 발표해 버렸다. ‘동양의 매력을 내뿜는 새로운 작품’이라며 일본 음악계가 들썩했다.
일본에 초청돼 오사카에서 함께 공연하면서 자신과 우리 음악을 도난 당한 분노에 치를 떨었다. 이성원은 ‘나는 역사를 바꿀 힘은 없지만 노래로 표현할 힘은 있기에 답답한 패잔병의 유산이 청산될 날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동요를 부르게 되었다’고 힘주어 말한다.
사석에서 노래할 땐 언제나 동요를 부른다. <엄마야 누나야> 등이 수록된 1999년 첫 동요음반<뒷문밖에는 갈잎의 노래>도 어느 조촐한 자리에서 그의 동요를 듣고 감격한 사람들이 강력하게 음반작업을 추진해 맺은 결실이다.
- 주간한국 인터뷰에서... .... ....